총 823페이지

817페이지 본문시작

태안군
815
적인역할을한사람이었다.남편이김양식을하자마금리주민들모두따라했을정도였다.
김의자씨는김양식을하던시절을떠올리며추운겨울맨손으로김을뜯어다어깨가빠지도
록몇번씩민물에씻고발에뜰때는남편을원망했다고말했다.마금리지주식김양식은조
개양식장에말뚝을박고채취하는방식이었는데갯벌에조개가덜들어오자모두철거했다.
마금리어촌계와바지락양식
마금리가 어촌계를 설립하고 양식장 체계를 갖춘 건 40년 전인 1980년경이다. 그때부터
주민들은 조개라는 호칭 대신 바지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김의자 씨는 마금리 어촌계
의 역사를 생생하게 알고 있었다. 어촌계 설립을 추진한 사람은 남편과 친척 시아주버니인
성희경이었다. 초대 어촌계장은 함세학이었으며 그 후로 박병래, 이병수, 최병정, 김충환 등
이역임했고현재는8대어촌계장으로김종태가맡고있다.마금리에어촌계가설립되고공
동양식장을 운영하면서 주민들 소득도 높아졌다. 바지락 채취 물량과 판매를 어촌계가 관
리하고지시했다.어촌계에서하루잡는양을정해주면계원들은그양만큼만잡았다.그리
고바지락은상인들과계약하여겉조개로팔았다.
마금리 어촌계 바지락 양식장은 ‘근소만’ 갯벌 ‘홍애불’이라는 곳이었다. 마을에서 6km
정도 거리다. 그 갯벌엔 ‘정산포, 법산리, 신덕리, 송현리, 파도리’ 등 다른 마을 바지락 양식
장이 인접해 있었다. 옛날엔 양식장의 경계를 얕은 갯고랑을 경계로 대충 어림했지만, 지금
은 측량하여 허가대로 몇 ha씩 소유하면서 쇠말뚝을 박고 줄을 띄운 상태다. 그녀는 각 마
을의 어촌계가 자기구역 침범을 막느라고 감시원을 두고 있는데도 가끔 고소·고발 사건이
생긴다고귀띔했다.
마금리 양식장에서 바지락이 가장 많이 잡힌 시기는 십여 년 전, 최병정 어촌계장이 있을
때였다.그해는갯벌에바지락이엄청나게들어와서어촌계에서는계원들에게무한정잡게
지시하여 김의자 씨는 하루에 300kg까지 잡았다. 어촌계에서 그렇게 바지락을 잡게 한 건
잡아내지 않으면 썩거나 물결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차츰차츰 바지
락이덜들어와서현재는예전같지않다며아쉬워했다.
평생을 갯벌에서 산 그녀는 요즘 바지락이 덜 들어오는 이유를 나름대로 설명했다. 마금

817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