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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전하기는 조부 윤석이 천양지화(泉壤之禍)를 입자 그가 아버지를 모시고 양성(안성)에 피신했다가
진위(평택)을 거쳐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왜 염치 대동리였는지는 모른다. 처가인 진주강씨(晉
州姜氏)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갑자사화를 기준으로 한다면 500년 전이 된다.
진주강씨 도사(都事) 강윤(姜胤)의 딸과 칠원윤씨 서령(署令) 윤문형(尹文亨)의 딸 등 두 부인 사이
에 의송(宜
), 의빙(宜聘), 의겸(宜謙), 의방(宜邦), 의신(宜臣), 의찬(宜贊), 사송(思
), 이송(而
등 8남2녀의 많은 자녀를 두었고 이후 후손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첫째 윤의송은 봉정대부로 인동
현감을 지냈고 둘째 윤의빙은 보령현감을 역임했으며 용인 지역에 자리 잡았다. 셋째인 참봉 윤의겸
은 아산에 다섯째 윤의신은 첨지중추부사에 올랐으며 평택 지역에 터를 닦았다. 넷째와 여섯째는 무
후였다.
윤인과 그의 아버지 윤인저의 묘는 고향인 경기도 안성에 있었으나 지난 1988년에 염치읍 대동리
황골의 석천동(石泉洞)으로 옮겨 모셨다. 후손들은 대동리와 탕정 용두2리를 중심으로 인근 영인과
음봉, 평택, 용인, 수원 지역에 거주한다.
참고로 인근의 탕정면 용두리 무재 마을에도 약 100년 뒤에 같은 파평윤씨 교리공파가 이주해왔으
며 윤인의 증조인 윤계흥의 아들 석(晳)과 구(
) 대에서 갈라진 친척이다.
-윤인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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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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