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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초명(初名)은 중흠(重欽)이고 자는 석여(錫余), 호는 오천(梧泉)이다. 부인은 동래 정(鄭)씨로 주( )의
딸이다.
1711년(숙종 37) 식년시 진사과에 합격한 뒤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갑과 3위로 급제했다. 용인현
감 등을 거쳐 1728년(영조 4) 장령에 제수되었다. 이 해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난을 토벌할 계책을
올려 공을 세워서 이듬해(1729)에 분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1733년 순천진 병마첨절제사, 1738년(영조 14)에 제주목사, 1741년 형조참의, 1743년 병조참지, 1747
년 승지, 1749년 한성부우윤을 역임한 뒤 1751년(영조 27) 형조참판을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그 후
나이가 많아 사직하였으나 다시 1753년 노직(老職-노인직)으로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인
1754년(영조 30) 공조판서에 올랐으며 이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게 되었다. 79세 때인 1760년(영조 36)
에 겨우 사직을 허락하며 왕은 손수 글을 써서 그를 포장(褒奬)했다. 80세가 되어 정1품 숭록대부(崇錄大
夫)에 올랐고 치사봉조하(致仕奉朝賀)에 제수되었으며 그 해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글씨와 문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경사(經史)에 두루 능통했으며《주역》
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완악편(玩樂編)》
《규반록(窺班錄)》
《경사증역(經史證易)》
《좌역참증(左易參證)》
·≪신증승평지(新增
昇平志)≫ 등의 저술과 많은 명문(銘文)과 시문(詩文)을 남겼다. 묘소는 아산시 배방면 세교리에 있다. 그
의 삼종손 영의정 봉한(鳳漢, 1713~1778)이 비문을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시호는 양효(良孝)다.
<영조가 내린 시(詩)비>
<홍중징의 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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