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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홍욱호
洪旭浩
, <1740(영조 16년) ∼ 1817(순조 17년)>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판서 중징(重徵)의 손자이고 현감 순보(純輔)의 아들이다.
자는 조린(照鱗), 호는 간구옹(艮九翁)이다. 어릴 때부터 명민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정진
했다. 특히 배방 회룡리 오동촌(梧桐村)에 농원을 만들어 꽃과 약초, 나무를 가꾸면서 의약 연구에도 몰두
했다. 그 사실이 알려져서 1786년(정조 10)에 약방도제조 서명선(徐命善)의 추천으로 왕을 입진(入診)했
으며 그 공으로 정릉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794년(정조 18)에도 도제조를 겸한 영의정 홍낙성(洪
樂性)이 추천하여 다시 왕의 병환을 진단하고 처방을 논의한 뒤 경기도 양지현감에 제수되었으며 1800년
(정조 24-승하)에 정조가 위중해졌을 때에도 다시 대궐에 들어가 국왕을 진료했다.
그는 정릉참봉을 시작으로 사포직장·상의직장·사복주부·경조주부·양지현감··장악주부·동부
령·양천현감·금부도사·호조참의·삭녕군수·부평부사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1815년(순조
15)에 호조참판 겸 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고 오위도총부부총관(副摠官)에까지 올랐다. 나이와 무능을 이
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왕은 가의대부(嘉義大夫-종2품)로 승차시킨 뒤
이를 윤허했다. 그는 검소하게 살았고 재산을 모으지 않았으니 그가 죽었을 때 집에는 곡식 한 섬이 없었
다고 한다. 묘소는 아산시 배방면 회룡리 상오동에 있다.
[131] 홍익현
洪益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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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은일·학자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당홍(唐洪)계이며 명신(名臣)으로 대사헌을 지낸
흥(興, 1424~1501)의 증손이다. 부사(府使)를 지냈고 기묘록속집에 이름이 올라간 사부(士俯)의 손자이
며 자는 군우(君友), 호는 송곡(松谷)이다.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했으며 천거로 시흥찰방(始
興察訪)과 수운판관(水運判官)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큰 그릇이 될 것이라 하
며 일찍이 충무공 이순신을 서평 한준겸(韓浚謙)과 서애 유성룡(柳成龍)에게 천거하기도 했다. 그의 딸은
경주부윤을 지낸 청백리 민기(閔機)와 혼인하여 문과장원 뒤 호조참의에 오른 민광훈(閔光勳)을 낳았으니
숙종 때 좌의정을 지낸 민정중(閔鼎重)의 할머니가 된다.
그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아산 염치의 송곡리에 와서 우거(寓居)하면서 마을 이름을 따서 호를 스스로
송곡(松谷)이라 했다. 금병산(錦屛山) 자락의 장자못 위에 집을 짓고 조용히 지내면서 강학(講學)과 연구
에 몰두했다. 처신이 바르고 고매했으며 가훈이 엄정해서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경모했다고 한다.
[132] 홍중징
洪重徵
<1682(숙종 8년) ∼ 1761(영조 37년)>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대사헌 이상(履祥)의 현손이고 판돈녕부사 만조(萬朝)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증 참의 진( )의 딸이며 그는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한성에서 태어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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