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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서 광 설
徐光卨
법조인 면천면 사기소리
출생 일제시대 항일 독립운동인사들의 소송에 항상 감형 내지는 무죄 판
결에 앞장섰고 변호사 시절엔 독립운동 인사들에게는 무료 변론을 계속해왔다.
21.
이 대 하
李大夏
이대하는
1809
년 생으로 당진군 대호지면 사성리 출신으로
대호지면 서기 혹은 금융관계취급 로 근무하며 면장 이인정
의 조카로 면민을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였다.
고종 황제의 폭붕으로 국장
國葬
이 있자 촌인 이인정 아
4
들인 이두하
李斗夏
가 남주원 등과 함께 국장 참례하러 갔
다가 서울 파고다 공원의
3 1
만세 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참
가한 뒤 고향에 내려와 숙질 및
3, 4
촌끼리 의논한 뒤 이 고
장 대호지에서도 독립만세운동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면직
원중 독립운동 협의는 표면상으로 빠지고 차 협의에 참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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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면장의 거동에 문제가 되어 사전 비밀이 누설될까 염
려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사상리에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있고
구국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던지라 박희용
朴熙容
남주
南柱元
박희탁
朴熙鐸
박용화
朴龍和
이두하
李斗夏
남계창
南啓昌
박경옥
朴敬玉
송봉운
宋峰云
천학선
千學
이규순
李奎淳
고수식
高壽植
남태우
南泰祐
송무용
宋武容
김순천
金順千
김형배
金衡培
성일
白聖日
정환철
鄭煥喆
김석곤
金石坤
이기안
李寄安
임억규
林億奎
공일손
孔一孫
성기한
成耆漢
신태희
申泰熙
신태리
申泰利
지방민 즉 사성리 등과 비밀리에 협의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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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에 본격
적으로 참여케 되어 면전체 결의에는 제 차로 참여케 되었으나 결국은 제 선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2
1
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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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의 연령으로 선배들의 뜻을 모아 면장인 백부와 상의하여 행동을 결행하였던 것이다
천의
天宜
장터에서는 남주원 한운석과 함께 독립의 당위성을 연설하였고 일본순사 니미야
二官
까지마
高島
만행에는 주재소 습격에 만족치 않고 상원순사 이재영 순사보 유옥우가 몰매 맞고 있을
때 이를 편들어 말이던 일본인 다지리네 집에 몰려가 엽총 정을 빼았아 이대하가 휴대하고 상원순사
1
환도는 면서기 김동운이 맡고 다지리네 권총은 면직원 송재만이 각각 휴대하여 해질 무렵 시위 군중 해
산 후에는 사성리 이대하 집에서 무기를 한데 모아 다음 거사를 위하여 대호지면 오지인 적소리 수풀에
송재만을 시켜 숨겨 두도록 하고 송전리 민재봉
閔載鳳
집에 모여 재거사 협의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일본 수비대와 헌병경찰에 의하여 불행하게도 이대하는 같은 부락 남주원 이인정 박희
용 천학선 등 수십명이 검거될 때 소요 강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정식으로
1919. 4. 23
구속되어
5. 13
일 기소된 후
9. 8
공판이 내려져
9. 10
공판 송치되어 징역 년 벌금
4 ,
30
원을
판결받고 상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월을 복역 후 석방되었으며 옥고나 고문은 형언할 수 없을
8
정도였다.
지금 그 자제 이범일
李範一
현재 장정리에서 서울로 옮겨 은 고생이 심했으나 애국운동이기에 가사
탕진에 후회는 없으나 국가보상이 늦음을 서운하게 생각하며 그래도
1990. 8. 15
독립유공자로 보훈 추
서 되었음을 자손의 도리를 다했구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과장이나 허위없는 사실이 밝혀
4 4
운동이 더욱 빛나기를 필자에게 바라고 있다
편저 박상건
唐津文化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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