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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1936년, 천안에 1939년, 당진에 1939년 등 1930년대에 들어서야 본당이 자리할 수 있었다.
서산에도 이런 영향이 있던 탓에 현재의 동문동에 서산 본당이 자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37년 10월에야 비로소 성당을 짓고 서산 도심에 자리할 수 있었다. 본당은 서산에 자리를 잡았
지만 이어지는 일제의 탄압으로 제대로 성장할 수 없었다.
1937년에 시작된 중일전쟁이 확대되면서 일제는 1939년 한국 사람들에게까지 징용령을 내
렸다. 같은 해에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시작되었다. 전쟁 중 일본이 통제를
더욱 강화하자 종교 활동 하나하나를 일일이 보고하며 다닐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인원뿐만 아
니라 자원 공출까지 이어져 서산 본당에서는 성당 종을 공출 당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동문동 본당에는 상홍리 공소에서 옮겨간 유명한 프랑스제 종이 있었다. ‘세사리’종이라 불리
던 이 종의 공출을 피하기 위해 성당 뒤편 대나무 밭에 숨기고 안면도 공소에 있던 종을 대신 공출
했다.
해방 후 서산지역 천주교회는 안정을 되찾는 듯하였으나 곧 닥쳐온 6?25전쟁으로 큰 시련을
겪었다. 1950년 9월 제7대 본당 주임인 콜랭(Colin) 신부가 공산군들에 체포되어 대전형무소로
5)
끌려가 피살되었다.
옛 본당이 있던 상홍리 공소에서는 백낙선 회장이 체포되어 면소재지인
음암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전쟁 이후 잠시 침체기를 겪었으나 곧 폭발적인 신자 증가가 있었다.
전쟁으로 정신적 공허를 경험한 사람들이 종교를 찾게 되었고, 외국에서 오는 구호물자가 천주교
회를 통해 분배되면서 서산 본당의 신자 증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1955년에는 성당을
증축하여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서산지역의 천주교는 확산을 거듭하여 여러 본당이 새로 설립되었다. 1964년 태안 본당이
서산 본당에서 분가된 것을 필두로 하여, 운산(1974), 해미(1985), 서산 석림동(1987), 대산(1989),
서산 예천동(2004)에 본당이 설립되어 오늘에 이른다.
5. 주목할 활동들
1) 출판?교육활동
서산지역 천주교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출판?교육활동에 눈을 떴다. 1937년 1월 본당이
상홍리에 있을 때『천주교 요리』
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아동들을 위해 등사하여 만든 이 책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삽화가 들어 있는 것이었다. 유년반, 소년 1?2반, 고등반, 특별반으로
5) 천주교 대전교구,
『대전교구 60년사』
, 2008, 24~26쪽.
5
http://seosan.cult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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