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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을 보면, 이 때에 이르러 이곳에서 천주교 신도들의 존재를 우리는 확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1839년 기해교난에 이르기까지 해미와 관련된 18명의 신도들의 행적이 확인
된다.
19세기 해미지방에서 천주교 신앙이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1860년대를 들 수 있다. 이 때에
이르러 이곳에서는 적지 않은 신도들의 존재가 발견된다. 그리고 1866년 병인교난을 당하여 이곳
은 이 지역 뿐만 아니라 다른 군현에서 이송되어 오는 신도들을 처형하는 곳이 되었다. 해미는 한
때 내포지방의 8개 군현 가운데 유일하게 진영(
)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신도들에 대한 처형이 집중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또한 해미에서는 1868년 4월‘오페르트 사건’
이 발생한 이후 신도들에 대한 집단 처형이 단행되
었다. 이 과정에서 신도들은 생매장을 당하기도 했다.
43)
1866년에서 1868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전개된 병인교난의 과정에서 이곳에서 순교한 117명에 이르는 순교자를 문헌자료를 통해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의 순교자는 이 숫자보다도 분명히 많은 수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순교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 지역의 순교자의 수가
대략 2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치에는 문헌적 사료 근거가 전무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해미지방의 순교자 숫자에 관한 과도한 추정은 피해나가야 할 것이다.
원래 순교자란 그 수적(
) 다과(多寡)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인으로서의 삶과
그 증거적( 據 ) 죽음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순교란 양적인 측면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질적 측면을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 한 명의 순교자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의미부여 여하에 따라서는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점은 해미지방의 순교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틀림없이 적용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해미지방에서의 서학운동 내지 천주교 신앙운동과 그 순교자에 대해 간단히
검토해 보았다. 이로써 우리는 19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 충청도 내포지역에서 활발히 전개되던
천주교 신앙운동을 확인하며, 성리학 중심의 조선왕조 사회가 붕괴되어 나가는 과정을 점검했다.
천주교 신앙은 당시 사회에서 비특권적 피지배층에 의해 실천되던 사회운동이었던 바, 이와 같은
사회운동의 구체적 전개상을 해미에서의 순교라는 사례를 통해 확인하게 될 것이다.
43) 珖, 위의 글, 128쪽. 이 생매장자는 1935년 바로(Barraux) 신부에 의해 해미면 초산리에서 발굴 확인되었고, 현재 이곳은
성역화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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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osan.cult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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