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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회는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하다가 순절하였다. 그의 아들 윤인우(尹仁佑)는 신창현감(新昌
縣監)을 지냈다. 그와 아들 윤인우(尹仁佑)의 묘가 신창 발리(鉢里)에 있었으나 실전되었다. 후손은
음봉면 소동리와 월랑리, 인주면 냉정리, 탕정면 명암리, 배방읍 공수리 등지에 산다.
[82] 파평윤씨 윤양선
| 尹楊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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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후기의 문신으로 파평윤씨(坡平尹氏) 23세이며 태위공파 교리공(校理公) 종중의 아산시 지
역, 탕정면 용두2리 무재 마을 입향조이다. 현재 용두2리에 거주하는 후손 34세(世) 윤태균(尹泰均,
54세)의 11대조이다.
그의 고조부는 인종 때 영의정을 지낸 뒤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1등에 책
록되고 파성부원군(坡城府院君)에 봉해진 효성공(孝成公) 윤인경<尹仁鏡, 1476(성종 7)∼1548(명종
3)>이다. 증조부는 절제사를 지낸 윤현(尹俔)이고 조부는 경상우수사를 역임한 윤사흠(尹思欽)이다.
아버지 사어공 윤영(尹泳, 1562~1649)은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하고 세자익위사 사어(司禦)를 지냈
으며 임진왜란 이후 선무원종공신에 책훈되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장흥임씨(長興任氏)
이다.
윤양선은 4형제 중 둘째아들이다. 자는 이성(而聖)이고 통사랑(通仕郞)에 올랐기 때문에 집안에서
는“통사공(通仕公)”
으로 칭한다. 부인은 고령박씨(高靈朴氏)로 교위 박응구(朴應
)의 딸이다.
그가 이곳 용두2리 무재 마을로 들어온 시기와 이유는 불확실하다. 외가나 처가 쪽의 인연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피난하여 들어 온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그 때는 소년 시절이어서
가능성이 낮다. 조부 이상의 선대가 주로 경기도 양주, 연천 지역에 근거가 있었지만 장남인 아버지
윤영은 묘소가 충남 논산 벌곡에 있는 점, 그리고 윤영이 후손들에게“내 자손들은 벼슬에 나가지 말
아라.”
하고 유지를 남겼다는 집안의 전설 등에 비추어 광해군의 집권이나 인조반정(1623년) 등의 정
치적 사건과 관련되어 낙향하였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시기도 대략 400년 전으로 본다.
윤양선은 수(
, 1614~?), 각(殼, 1622~1696), 전(
, ?~?), 규(珪, ?~?)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수
는 묘가 송악면에 있던 것을 염치읍 대동리(황골)로 옮겼고 둘째아들 각은 충북 진천으로 이주하였으
며 묘는 논산 벌곡 부친 묘 아래에 있다. 셋째 전은 이곳 무재에 계속 살았고 묘도 현 위치에 모셔졌
으며 넷째 규 역시 아산 지역에 살았고 묘는 염치읍 대동리(황골)에 있다. 이후 입향조 윤양선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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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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