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785페이지

78페이지 본문시작

성환은 지금도 소도시에 불과하다. 무려 60년 전에 금방이 세 개나 있었다고 하니, 금광이


,
성환경제에미친영향도꽤크다고볼수있다.그래서생겨난말이‘노름판금점판’이다.

?


성환의 상류(上流)인 성거와 입장도 금광이 발달했기에, 물에 흘러 내려온 사금 채취가 번

?

창했다. 어려서부터 사금을 채취하는 준설선인 금배를 구경하러 다니기도 했다. 재미있는


일화는금광업자인입장의박영민이국회의원에낙선할때마다금이쏟아져나와선거비용
?


을보충하곤했다는전설같은이야기다.금값에대한질문에,먹고살기힘든시절이었기에
?
2
금값보다쌀값에더예민했다는답변이돌아왔다.
금광개발에따라시골마을에기생이여러명인고급술집이생겨났으니,관심과화제의
대상일수밖에없었다.그이름은화성관(華成館)이다.어른들은그곳에다녀온것이큰자랑
이었고,청소년들은성공해서큰돈을벌어그곳을드나들수있는사람이되는꿈을꾸었을
76
것이다. 구술자는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의 한의원에 드나들곤 했는데, 당시 그곳은 지역 유
지들의사랑방이었기에그런대화를많이들었다고한다.
위치는 성환5리 성환성당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으로 신선동 서북쪽이다. 건물 모
습은한옥으로방이4개정도로짐작되고,한자로된간판도걸려있었다.건물옆에큰우물
이있었다.성환지리에어두운질문자는율금리금광에대한면담에서화성관이멀지않은
곳에 있었다고 들었다. 따라서 문화원에서는 꽤 떨어진 곳으로 짐작했었다. 구술이 끝나고
화성관 터를 안내하여 찾아갔더니, 문화원에서 직선거리로 100m 남짓한 그야말로 지척의
거리였다. 위에 적은 대로 성환성당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는 길 바로 밑에 있는 ‘뜰안채’ 맞
은편이다.현재모습은3층건물의상가주택으로1층은‘한국유리’라는간판이걸려있다.
금광과관련하여이고장에내려오는전설같은이야기가있다.화성관이한창성업중일
때는 신사복을 입은 사람은 입장을 거절하고, 돌가루를 뒤집어 쓴 광부들만 환영을 받았다
고한다.녹두알크기의금조각을술값으로내기도했기때문이었다.일본인이금광을관리
할 때는, 일본인의 착취에 대한 반감으로 작은 금 조각을 호박잎에 싸서 목으로 넘겨 변(便)
으로나오게했다는말도많이들었다.
많은 화제 거리를 만들어내며 성업 중이던 화성관은 해방과 함께 일본인이 쫓기면서 문
을 닫았고, 건물이 헐린 것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때로 기억된다. 그 후 화성관의 역할
을 대신하는 고급 술집으로 인천집, 이화장 등 서너 군데가 생겨났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질

78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