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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3년(숙종 19)에 문장(文壯)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부조묘(不 廟-불천지위)가 내려졌다. 한편 홍성에
도 홍주목사 재임 중의 공을 기려 당시 춘추관 편수관이었던 조경(趙絅)이 찬한 홍양청난비(洪陽淸難碑)
가 1641년(인조 19)에 세워졌다. 부여에 있는 도강영당(道江影堂)에도 허목(許穆)·채제공(蔡濟恭)과 함께
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그의 묘가 있는 염치 대동리에도 후손들이 세운 영당(影堂)이 있다. 홍성 서
쪽의 백월산 기슭에 그를 중심으로 다섯 충신을 모신 사당이 있으며 산 정상에도 무속인들이 그를 신격화
해서 장군으로 모시는 신당이 있다.
일찍부터 시와 문장에 능해서 뛰어난 시를 많이 남겼고 특히 왜란 중에 올린‘적패퇴봉사(賊敗退封事)’
는 명문으로 유명하다. 또한 성리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어서 정통 학맥에 속한다. 율곡과 마찬가지로 이
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했으며 노장사상과 불교를 배척했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온양의
정퇴서원(靜退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만전집》
《만전당만록》
이 있다. 묘는 염치읍 대동리에 있다.
그가 스스로 비문을 지은 비갈이 있고 중추부사 조경(趙絅)이 비문을 지은 신도비가 1717년(숙종 43)에
세워졌다.
<홍가신의 묘>
<홍가신 영정>
[126] 홍기
<1634(인조 12) ~ 1708(숙종 34) >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명신(名臣) 만전당(晩全堂) 가신(可臣)의 증손자이고 부사
과 비( )의 손자이며 장예원판결사 우기(宇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열녀 정려가 내려진 여흥 민(閔)씨
이며 부인은 양천 허(許)씨로 첨지중추부사 학( )의 딸이다. 자는 언명(彦明), 호는 장졸당(藏拙堂)이다.
1657년(효종 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66년(현종 7) 식년 문과에 급제했다. 함경도사(都事)로 있던
1669년(현종 10)에 성균관에서 여러 경서(經書)의 교정을 볼 일이 있었는데 대학자 송시열(宋時烈)과 민
정중(閔鼎重)이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함께 천거해서 그가 책임을 맡아 여러 해 동안 교정 작업을 추진하
였다. 관직이 병조정랑지제교(知製敎)에 이르렀다. 묘는 아산시 인주면 해암3리 한절골(한자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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