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228페이지

77페이지 본문시작

성선생유허비음
우암선생이지은비문현묘(조선조9년1668년)
무신년에 있어 문민정공(여흥민유중)이 장차 비석을 세우려다 이루지 못하고 후에 숙종 경
오년(16년 1690년)에 비로소 비석을 세우고 단서에 이르기를 창영 성선생의 가문의 글이 없어
졌다. 때에 사문(유교유학)이 성할 때에 어찌 두려워 꺼림이 있겠는가. 지금 이공기진(李公箕鎭)
이 대총재(大 宰)로 이 고을의 척보를 보고 탄식하여 이르되 비석은 있는데 글이 없어 어찌
후세에 보이겠는가. 이것은 안된 것이다. 유허는 있으니 또한 의로움이 있지 않는가? 드디
어 비석을 새겨 이후 사년 임자년에 성선생 신루를 인왕산 봉애에서 나와 경외 장본인 우
암(송시열)이 받들어 유허지의 구택에 봉안하고 문정공이 일찍이 수리한바라 그 자세한 것
은 우암의 기록한 글 가운데 있으나 후에 병자년(숙종26년 1700년)에 많은 선비가 그 곁에 사당
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선생의 신루를 옮겨 봉안한 후 을축년(1685) 오선생(사육신 다섯분)을 아
울러 병술년(1706년)에 향사하였고 또 그 집에 성선생 아버지 총관공을 동시에 순절하고 추
향(追享)하려 하였으나 부득이 같이 봉안함이 맞지 않아 하지 않았다. 임신년(1752년)에 유생
이 청하는 상소로 인하여 사액하려 녹운이라 하고 문정공 아들 판서공 진후가 우암에게 이
고을은 반드시 노은(魯恩 : 노나라의 은혜)의 은혜가 있다하여 노은이라는 그 뜻을 하였다. 기축
년(1769년) 상께 아뢰어 드디어 고치어 분포하라고 명하였다. 도총관과 선생부인 묘소가 서
원 동쪽 건너 한 낮은 산에 있으니 조정에서 성씨를 몰수한 전토(田土) 십칠결을 허하여 본
서원의 제사와 노비를 쓰게 하고 그 은혜로 보답하고 법도를 갖추었다. 홀로 우암이 칭술
(稱述) 한줄로현각하여오래도록사람들의애석함을지금원을이룬것이다.
이는 어찌 기다림이 있지 아니한 것인가? 무릇 일이 무신년 이후 공이 나에게 이때의 일
을삼가밝혀기록할것을요한것이다.
숭정갑신(1644년)후백일년갑자년(1744년) 사월일
후학파평윤봉구기록
덕수인이기진씀
홍성의금석문_77

77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