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883페이지

75페이지 본문시작

로 입사, 젖소 관리부에서 근무했다. 32세라는 늦은 나이에 이웃 평택의 대사리를 고향
으로하는규수와결혼,슬하에2남2녀를두었다.장자는공업고등학교를나와전기관
련 업체에 근무하고 있고, 차남은 서울에서 살고 있다. 두 딸은 모두 결혼해 외지로 출가
했다. 농촌마을에 거주하면서도 직장생활을 했던 그는 아버지의 농사붙이를 일부 거들
면서한번도고향을떠난일이없었고,자식들이출가한이후1993년59세되던해,집
을허물고새롭게개축했다.
평생 삶의 터전인 신가리와 이웃해 있는 축산시험장의 직장생활은 그에게 고향지킴이
로 이어올 수 있게 한 근원이었다. 흔히들 성환목장으로, 국립종축장으로 불리는 국립
축산과학원(현재의 정식 명칭)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인 ‘카호시데쓰마[赤城鐵馬]’가 종마
(種馬) 생산을 위한 소규모 목장으로 출발했지만 1928년 젖소 도입으로 낙농사업을 본
격화했다. 그러던 것이 해방되면서 1947년 국립으로 이관되고, 농사개량원 성환축산시
험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한상범은 이 이름으로 불리던 때인 1962년 입사하여 성환
목장과한평생을함께하였다.
그뿐 아니었다. 관광산업이 발전되지 못했던 6,70년대 성환목장은 각급 학교의 소풍
지로 각광을 받았다. 목장 내 이승만 대통령 별장으로 쓰였던 99칸 목조기와집 취원각
(翠遠閣)은 참으로 아름다웠고, 축산연구를 위한 방목지인 너른 목초지, 영화촬영으로
인기였던 목가적인 목장 풍경, 금송, 독일가문비나무, 전나무, 메타스퀘어, 서어나무 등
고급 수종으로 정원을 이루었던 격조 높은 목장 곳곳의 풍경이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였다.그는밤낮으로이러한풍경을벗하면서보냈던시간이행복했다.
그가 풍운의 꿈을 안고 입사한 이곳에서의 생활은 늘 즐거웠다. 1994년 농촌진흥청
축산시험장과 통합, 농촌진흥청 축산기술연구소로 통폐합이 되고 2년 후 정년퇴직하면
서34년간의축산과의인연을끝맺었다.
취원각은 본래 판서를 역임했던 양반가의 주택으로 지었다고 한다. 일제강점 이후 성
환목장이 만들어질 때 일본인 목장주가 그 집을 철거하고 그 재료를 다시 사용하여
150평 부지 위에 외부는 한식, 내부는 일식으로 개조해 취원각이라 이름짓고 목장주의
천안서북구 73

75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