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216페이지

75페이지 본문시작



禮山의
이만(李曼)(1605~1664)
조선후기의문신으로자는지만(志曼),본관은전주이
다.
양녕대군의후손이고형조참의휴(?)의아들이다.
1627년(인조5년)박사(博士)에뽑히고,이듬해별시
문과에장원으로급제하여형조낭청겸기사관을거쳐
예조좌랑,정언을지내고지평으로있다가대사간정온
을옹호하다가체직되었다.
이만의 신도비
1636년부수찬을거쳐수찬으로있을때적극적인척
화를주장하다가병자호란을맞았다.호란후에는어머니의상을당하여한때관계를떠나있었다.
1639년복직하여헌납,교리,수찬등의요직을역임하였으나아버지의상을당하여다시향리로돌
아간다.
1644년교리가되고정랑을거쳐승지가되었으며이어황해도관찰사로부임,이듬해에완원군(完
原君)에봉해졌다.1647년도승지가되고이어평안도관찰사가되었으나정명수의종용으로교체되
어대사간이되었다가,1649년에경상도관찰사로나가적폐(積幣)를시정하고성지(城池)의수축과
병졸의훈련등으로국방에힘썼다.
효종이즉위하면서병조참판이되고이듬해인1650년(효종1년)에는대사헌을거쳐도승지가되었
다.그러나그가경상감사로있을때표한선(漂漢船)이있어조정에는이를청나라로압송하면서그
주문에왜정가려(倭情可慮)라는이유로남방의수성연졸(修城鍊卒)을주장한일이있다.즉‘왜국의
정세가염려스러우니성을보수하고병사를훈련시키자는말’인데청나라는이것이병자호란의규약
위배라며사신을보내어추궁하니당시동래부사였던조경과영의정이었던이경석등이책임을졌는
데,그도영변으로귀양갔다풀려났다.
이듬해에는황해도관찰사,강화유수를거쳐전라도관찰사를지내고,평안도관찰사로있을때에그
가전라도관찰사로재직시완도의국금지(國禁地)에설장(設莊)하여치부하였다하여파직되었다.
현종이즉위하자공조참판으로복직하였다가1616년(현종2년)공충도관찰사로나가부모의묘지
를개장하면서민가를철훼하였다는이유로파직되었다.
우의정원두표(元斗杓)의강력한추천에힘입어1662년호조참판에임명되고,이듬해진하겸사은
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청나라에다녀와서한성부윤이되었으나,일행가운데금물도매자(禁物盜
賣者)가있다는탄핵을받아정사정유성(鄭維城)의강력한추천에도불구하고벼슬을그만두고아
산의시골에서죽었다.그는지방관으로오래있는동안농사짓는방법과토질을잘가려내는일등에
일가견이있었으나너무도인색하고이재(理財)에밝다는이유로당시사람들이싫어하였다한다.
75

75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