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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보인다. 몽학정난비는조선선조때1596년(선조29) 임진왜란중에이몽학이주
동이되어충청도홍산에서일으킨반란을진압한홍주목사홍가신(1541∼1615)을비롯
한청난공신을기리는비석이다. 비는인조19년(1641)에세웠는데, 오랫동안돌보지못
하여파손된것을1973년홍성군수가보수하여오늘에이르고있다.
55)
⑥ 금마천 : 『여지도서』에서 금마천은 관문, 즉 조양문으로부터7리 거리에 있다. 조선
시대 금마천은 조선 전기의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먼저 찾을 수 있다. “금마
천(金馬川) 주 동쪽 5리에 있으니, 오서산에서 발원하여 덕산현 신교천(薪橋川)으로 들어
간다.”라고『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홍주목‘산천’조에기록되어있다. 이와관련하여
현재조양문으로부터동쪽으로1.8㎞거리에있는삽교천을생각할수있다. 삽교천은그
원류가홍성군장곡면오서산(烏棲山, 791m)이고, 이곳에서발원한후북쪽으로흘러아
산만으로흘러드는하천이기때문이다.
아울러삽교천은지역마다부르는명칭이 다른점도지명을통해위치를추정할 때도
움이 된다. 예컨대 홍성군 홍동면을 지나면 ‘홍동천’, 금마면을 지나면 ‘금마천’, 예산군
삽교읍을 지나면 삽교천, 옛 조선시대 덕산현을 지나면 신교천(薪橋川)이라 불렀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덕산현 ‘산천’조에 의하면, “신교천(薪橋川), 현 동쪽 17리에
있다. 홍주(洪州) 금마천(金馬川)의 하류이며, 정포로 들어간다.”라고 하여 조선시대에도
오서산에서 발원한 하천이 홍주목 동쪽을 지나면 ‘금마천’, 덕산현 동쪽을 지나면 ‘신교
천’으로불렸음을알수있다.
한편 신교천(薪橋川)과 관련된 한자를 풀면, ‘薪’은 땔나무, ‘橋’는 다리, ‘川’은 하천을
가리킨다. ‘하천을 지나갈 수 있는 다리를 땔나무와 같은 것으로 만든 곳’이라는 해석이
55) 이몽학은본래왕실의서얼출신으로,아버지에게쫓겨나충청도·전라도등지를전전하다가임진왜란
이일어나자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휘하에서활동하였다. 그러나계속되는흉년으로 민중들의
생활은비참한데,당시조정에서는명(明)·일(日)사이에강화를둘러싸고찬반논쟁이치열하였다.일
본의재침을방비하기위해각처의산성을수축하는등민중의부담이가중되자확대되어가는민중의
원성과고통은현실여건과타협될수없는사회모순을낳게되었다.이러한기회를포착해이몽학은
불평불만에 가득 찬 민중을 선동, 반란을 획책한 것이다. 그는 반란을 일으키기 얼마 전부터 한현과
함께홍산(鴻山: 지금의부여군) 무량사(無量寺)에서모의를하고군사를조련하였다. 동갑회(同甲會)
라는비밀결사를조직해친목회를가장한반란군규합에열중했다.난을토평(討平)하는데공을세운
사람은 1604년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책록되었다. 1등에 홍가신, 2등에 박명현·최호, 3등에 신경
행·임득의등이책록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4_역사를 품고 살아 숨 쉬는, 홍성의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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