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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山의
이목(李穆)(1599~1624)
조선후기의무신으로자는명원(明遠),본관은한산(韓
山)이며의배(義培)의아들이다.삽교이리출생이고25세
의젊은나이에죽어행적은간단하다.
인조반정은서인일파가광해군및집권당인대북파를몰
아내고능양군인인조를왕으로추대한사건이다.
1618년에발생한인목대비유폐사건은대북파에게눌려
지내던서인일파에게반동투쟁에좋은구실을주었다.서
인의이귀,김유,김자점,이괄등은마침내거사하였다.이
이목의 묘 (경기도 양주군 청송면)
때장단으로부터군사를몰고참가한경기감사겸부원수가된“이서(李曙)”는이목(李穆)의외숙(外
叔)이다.
이괄(李适)은인조반정때공이많았음에도불구하고반정이끝난후겨우2등에책봉되어한성부윤
에임명되었을뿐아니라아들또한반정에참여하였지만논공에서제외되고,아우수(邃)도문관으
로등용되지못하는점등에많은불만을가졌다.그러던중관서지방에서변란이있을징조가있다
하여이괄이다시금도원수장만의휘하에부원수겸평안병사로좌천되어영변에머무르게되자그
의불만은더욱커져반란을꾀하게되었는데밀고되어인조가그부자를체포하라고명령하여드디
어그의아들이체포당하게되자부하들과함께1624년(인조2년)반란을일으켰다.1만여의병력으
로정부를공격하자평안도,황해도일대는반군수중에들어갔다.토벌군과장만의추격군이막았으
나반군은승리하여개성을통과하여서울을점령하였다.
이목은1624년초시에장원하고복시(覆試)에행차중이괄의난으로인조왕은파천하였다.어림군
(御林軍)으로는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경기감사완풍군이서(完豊君李曙)를부원사(副元師)로
하여대적케하니이목(李穆)은외숙(外叔)의청(請)에따라막하종사관(幕下從事官)으로들어가
송도(松都)에서부터방어에참여하다가서울이함락되어장령(將令)에따라이괄의진중을정탐(偵
探)코저서울소덕문으로잠입정탐(偵探)중발각되어이괄(李适)에게끌려가회유해도거절하고
철곤을맞아불굴이사(不屈以死)하니나이25세였다.
흥분된정부군쪽“장만”추격군한테이괄의반군이질마재고개에서참패하고이괄마저부하한테죽
임을당하자이괄의난은17일만에끝났다.
왕은이를차탄(嗟歎)하고애도하며불굴이사(不屈以死)한기개(氣槪)를높이찬양(讚揚)하여호조
판서(戶曹判書)에추증(追贈)하고한원군(韓原君)으로봉(封)하고정려(旌閭)를명하였다.묘는경
기도양주군청송면대탄리(楊州郡靑松面大灘里)에있다가개발지역으로수용되어2011년청명일
(淸明日)에예산군봉산면봉림리산31번지로천묘(遷墓)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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