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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닌 곳이고, 배꽃축제가 열리는 왕지봉의 전망대에서 동서남북으로 지형을 조망해 보곤


했었기에 익숙한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평야지대에선 갱도 채굴이 아닌 노천 채굴 방식일

?


것이라는선입견이있기도하였다.


그외에도전국적으로불리웠다는‘금노다지타령’이나큰금맥의발견등에대해질문했
으나, 없었다거나 모른다는 답변이어서 조금은 아쉬움을 안고, 본 주제인 율금리 금광이야
기로넘어가기로했다.
언제부터 금광개발이 시작되었는지 대략이라도, 아니면 짐작이라도 말씀해 달라고 했으
나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예상보다 폐광 시기는 늦었는데 1970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탄광은 매우 깊이 파 내려간다고 알고 있는데, 율금리 금광의 경우는 보통 100m 정도이고
가장 깊은 곳이 200m 정도였다. 수평거리는 금이 나오는 정도에 좌우되는데 400m 정도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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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본양산은 거의 다 뒤진 셈이라고 한다. 다른 쪽에서 굴착해 들어오는 갱도와 연결될 때
는 시원함의 극치를 맛보기도 했다. 갱도의 입구를 동마구리 서마구리로 불렀다. 샘을 파듯
이수직으로파내려가기도하는데이를쌤이라고불렀다.
광산개발의전체를관리하는경영주를광주라불렀고,사업자금을제공하는사람은돈
주(연상이라고도 함)라고 했다. 조재욱은 자모작으로 참여했는데, 이는 스스로 다섯 명씩 작업
조를 짜서 들어가 일을 하고, 수확한 금을 분배받는 방식이었다.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서이제어떤비율로배분했는지는기억이없는데,별로큰돈은아니었다.
당시에 착암기는 없었고 다이너마이트로 터트리면 괭이로 긁어내는 방식이었다. 규모는
크지 않았어도 그걸 싣고 나오는 레일은 만들어져 있었고 금방앗간은 갱도에서 가까운 곳
에 있어서 어렵지 않았다. 금방앗간은 다섯 괭이가 한 조로 두 개 조의 열 괭이가 있었는데,
앞에는 좁고 뒤에는 넓은 구조였다. 금이 박힌 돌을 빻을 때는 파이프로 연결하여 물을 넣
으며작업이진행되었다.
방아를찧고난후의선별작업은구리로된동판과수은이이용되었다.금이섞인돌가루
를 체에 넣고 좌우로 출렁거리면, 밀가루처럼 잘게 부서진 금이 체를 통과한 후 동판에 뿌
려놓은 수은에 잡히는 방식이다. 금을 먹은 수은은 무겁기 때문에 동판에 가라앉으면, 동판
을밀어서금을모을수있었다.그것을광목에싸서빨래를짜듯이비틀면밤톨만한금덩어
리가되었고,그것을다시숯불로가열하며풍구질을하면수은은날아가고금만남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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