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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예산학 특강 - 禮山이 낳은 금석학자 秋史 金正喜 재조명
수준은 광대정미(廣大精微)한 경지에 이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금석학’으로 양립될 수 없다. 한 예로 김정희가 무장사비와 인각사비를 그토록 중시했던 것은 따지
김정희는 청조 학풍에 대하여 시종일관 열린 태도를 견지하였다. 실사구시적 학문 태도로써 청학의
고 보면 왕희지체의 공부에 그 주안이 있었던 것이다.
장점을 두루 수용하였다. 사실 어느 면에서 보면 김정희의 학문 세계는 자득지미(自得之味: 독창성)
김정희의 금석학 연구가 우리나라 서예사 연구와 병행되었으면서도, 서예사 차원을 넘어서지 못
보다 의양지태(依樣之態: 모방·답습)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그가 주장했던 이론은 하나하나 뜯어
한 것은 김정희 개인의 한계이자 그 시대의 한계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그가 55세 이후 늘그막에 남
보면 선대 학자들과 관련 없는 것이 거의 없다. 자신만의 ‘독특함’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북의 극변(極邊)에서 10여 년간 귀양살이를 했던 것이 큰 저해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만년의 중요한
추사학에는 청학의 수용이라는 한 축과 조선의 선배 학인들로부터의 영향이라는 다른 한 축, 그
시기에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 학문적 열정과 조예로 보아 금석학 연구가 더욱 광채를
리고 김정희의 독자성이라는 또 다른 한 축이 엄존한다. 김정희는 청국과 조선의 학인들이 이루어
발하였을 것이다. 현장 조사를 중시했던 김정희는 40대까지 조선 팔도를 발로 뛰면서 금석자료를
놓은 학문적 토대 위에서, 많은 선구적 이론을 수용하여 절충을 통한 ‘겸전(兼全)의 학문’을 추구하
섭렵하였으나, 이후 일련의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도중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였고, 법고(法古)와 창신(?新)의 양면을 조화시켰던 것이다. 여기에 독창성과 개성이 개재할 자리
김정희가 금석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감식다운 감식’, ‘고증다운 고증’은 사실상 김정희 개인의
가 마련되었다. 김정희의 학문을 ‘청학의 아류’쯤으로 보거나 그의 학문 태도를 ‘청학에의 추종’으로
몫이나 다름없었다. 옹방강·완원 같은 학자는 김정희가 금석학의 영역을 개척하는 데 선도자요 후
보는 것은 단견이라 하겠다.
96)
원자요 스승이었지만, 조선의 금석학에 대해서는 김정희에게 일주(一籌)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
김정희가 우리나라 금석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실로 부동의 것이라 하겠다. 다만 그가 금석학
다. 청나라 학자들이 김정희의 견해를 전적으로 따르다시피 하였음은 유희해의 『해동금석원』 등이
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선배 학자들이 이루어 놓은 성과가 일정하게 기반이 되었음은 간과할
증명한다. 그러다 보니, 김정희의 명성은 날로 배가(倍加)되었고, 또 후대로 내려올수록 전설적 신
수 없다고 본다. 중국의 역대 학자, 특히 청대 학자들로부터의 영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김
화적 인물로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혼자서 공부하여 동반자가 없다시피 한데다가 기견(己
정희는 중국 학자들로부터의 ‘수용’은 문집 등에서 직, 간접으로 밝혔으나, 조선의 선배 학인들로부
見)에 대한 확집(確執)이 강하다 보니 고증에서 편향성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김정희 개인
터 물려받은 성과라든지 영향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홍양호·유득공·유본
뿐만 아니라 조선의 금석학을 위하여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학 등, 김정희에 앞서 추사 금석학에 가교적 구실을 했던 이들의 공헌과 후대에 끼친 영향이 가려지
끝으로, 추사 금석학의 연구와 관련하여 2006년에 알려진 김정희의 『해동비고』 및 옹방강의 『해
거나 무시된 측면이 있다.
동금석영기(海東金石零記)』, 조인영의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 등이 일반에 공개되어 연구자
김정희가 금석학에 관심을 갖고 영역을 개척하게 된 배경을 보면 일차적으로 서예적 관심에서 출
들에게 이바지하기를 바란다. 『진흥이비고』와 함께 추사 금석학의 양대 자료라 할 만한 『해동비고』
발하였다. 이것은 그가 “나는 젊어서부터 글씨에 뜻을 두었다. 24세 적에 중국 연경에 들어가 여러
의 공개가 급하다.
명석(名碩)들을 만나보고 그 서론(緖論)을 들어본 바 있다”
97)
고 한 언급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
후 연구의 심도를 높여가는 과정에서 경학이나 역사학의 보조학문으로서의 가치와 의의를 뚜렷이
인식하였고, 마침내 ‘금석학’이란 독자적인 영역과 문호를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국적 차원에서 볼 때 김정희가 명실 공히 우리나라 금석학의 비조이자 대성자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금석학의 틀은 ‘서예적(서체적) 관심’의 단계와 수준을 넘어섰다고
보기 어렵다. 김정희 자신은 물론 추사서파(秋史書派) 학인들은 서예를 위해 금석학 연구를 기본으
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엄밀히 말해서 김정희의 금석학은 최완수의 분류처럼 ‘서도금석학’과 ‘경사
96) 이은혁, 「추사 금석학의 성과와 의의」, 양광석교수정년기념논총, 2007 참조. 
97) 『완당전집』 권8, 14b, 「雜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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