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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올렸는데 내용을 시비하는 사람이 없었다. 문집으로《포저집(浦渚集)》
을 남겼다.
그가 죽자 왕과 세자가 관원을 보내 치제하도록 했고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묘는 예산군 대술
면에 있고 그의 문인 윤선거(尹宣擧)가 지은 묘지(墓誌)와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가 세워졌다. 그는 개
성 숭양서원(崧陽書院), 광주(廣州) 명고서원(明皐書院), 그리고 1670년에 그를 모시기 위해 세운 신창(新
昌-도고면 도산리)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도산서원은 흥선대원군 때(1871년) 철폐되
었는데 풍양 조씨 문중에서 지난 2006년 12월에 그의 묘가 있는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종산에 이전·복
원했다.
[118] 차천로
車天輅
<1556(명종 11년)~1615(광해군 7년)>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으로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광운(廣運)의 손자이고 군수 식(軾)의 아들이다. 개
성 출신으로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난우(蘭 )·귤실(橘室)·청묘거사(淸妙居士) 등이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개성향교 교수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정자(正字)
재직 중이던 1586년에 고향 사람의 과거(科擧) 표문(表文)을 대신 지어준 죄로 명천으로 삭직·유배되었
다. 이 후 문재(文才)를 인정받아 용서받고 1590년(선조 23)에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
왔다. 이때 4,000여 수의 시를 지어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으며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담당해서 명
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왜란이 끝난 뒤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송별시 600운을 지어 동방문사
(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다. 1597년(선조 30)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봉상시판관·교리·봉상시
첨정을 지냈다.
시와 가사(歌辭)·글씨에 뛰어났다. 한호(韓濩)·권필(權億)·김현성(金玄成)과 함께 서격사한(書檄詞
翰)이라 일컬어졌다. 또한 시(詩)로서 글씨의 한호(韓濩) 문장의 최립(崔
)과 더불어 송도3절(松都三絶)
로 칭해졌고, 아버지 식(軾)과 동생 운로(雲輅)와 함께 3소(三蘇)라 했다. 저서로《오산집 (五山集)》
《강
촌별곡(江村別曲)》등이 전하며, 아산 지역에서는 8문장(八文章)으로도 유명했다.
[119] 채응정
蔡膺禎
<1685(숙종 11년) ~ 1754(영조 30년) >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강(平康)이다. 평강 채씨 18세(世)로 아산(염치읍 대동리) 입향조이다.
진사로 통진현감을 지낸 영후(榮後)의 진사 시경(時鏡)의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 증 호조참의 봉장(鳳章)
은 경기도 양평에서 천안 풍세면 삼태리로 이주한 것으로 보이며 봉장의 다섯 아들 중 셋째 응정과 다섯
째 응희(膺禧-묘가 탕정면 용두리에 있음)가 아산 지역으로 와서 자리 잡고 산 것으로 보인다.
그(응정)의 자는 천휴(天休)이고 부인은 안산(安山) 김씨이다. 아들 정하(廷夏)가 1753년(영조 29)에 문과에
급제한 뒤 정언·장령·사성(司成) 등을 지내며 귀하게 되어 그도 자헌대부 호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묘는 탕
정 명암리에 있었으나 삼성전자 공장부지로 수용되어 아버지의 묘가 있는 천안 풍세면 삼태리로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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