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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지리지상으로 진
다. 그런데 이들 사업은 주로 읍치 공간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까지 살펴
산ㆍ주산을 확인할 수 없는 덕산현
보았듯이 지역의 실제적ㆍ상징적 중심으로서 읍치가 갖는 역사성이나 장소 의미는 읍치가
의 경우 『여지도서』와 『산경』 기록
기대온 진산 또는 주산을 배제하고 생각할 수 없다. 특히 최근 산지와 하천으로 대변되는 생
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읍치 서쪽에
태 환경 요소에 대한 관심이 부각되고 있는 상황에서 전통 도시 읍치의 진산과 주산은 도시
위치한 가야산이 진산이자 주산임
공간에서의 생태 환경 확보라는 차원에서 읍치 공간과 더불어 하나로 묶여져 접근될 필요가
을 알 수 있다. 『여지도서』에서 가야
있다.
산까지의 산 흐름을 보면 “가야산은
현 서쪽 10리에 있는데 대치로부터
5.지명
왔다.”, “대치는 현 서남간 15리에
있는데 덕숭산으로부터 왔다.”, “덕
숭산은 현 서남간 10리에 있는데 홍
1)예산군(禮山郡)
주 오서산으로부터 비스듬히 북쪽
1914년 기존의 예산군ㆍ대흥군ㆍ덕산군이 합쳐져 등장한 행정 구역으로 현재 충남 15
으로 뻗어 온다.”라고 하여 덕숭산
개 시ㆍ군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행정 구역상 군의 동부는 예산현, 서부는 덕산현, 남부는
으로부터 대치, 가야산으로 이어지
대흥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예산’이란 명칭이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개국 직후
는 산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인 919년(고려 태조 2)인데 태조의 후삼국 통일 과정 중 예산 일대를 포함한 삽교, 아산만 지
『산경』에서는 송악산→차유령(차동
역의 우호적 민심과 관련해 ‘예를 숭상하는 지역’이란 의미로 개칭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당
고개)→오서산→보개산→월산(홍
시 예산현(禮山縣)은 백제 임존성(任存城)이 신라 경덕왕 때 개명된 임성군(任城郡)의 속
[그림14]조선시대덕산현읍치의진산ㆍ주산인가야산(『1872년덕산군지도』)
성)→수덕산(현 덕숭산)으로 해서 가
현 중 하나로 『삼국사기』에는 백제시대 명칭이 오산현(烏山縣)이었고 경덕왕 때 고산현(孤
山縣)으로 바뀌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계속 예산현으로 유지, 1895년(고종
야산으로 이어지는 산 흐름과 가야
산 서술 내용에 “덕산 읍치가 동쪽 9리에 있다.”라 하여 결국 덕산현 읍치의 주산은 가야산
32) 근대적 행정구역 개편 때 홍주부(洪州府)의 예산군이 되었다가 1896년 충청남도 예산
임을 알 수 있다.(표 7) 더불어 앞서 말했듯이 여러 군ㆍ현에서 주산과 진산 개념이 일치되
군으로, 이후 1914년 대흥군ㆍ덕산군과 합쳐져 통합 예산군의 명칭이 되었다.
는 것으로 보아 주산인 가야산이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는 진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그
2)예산읍(禮山邑)
림 14)
지금까지 현 예산군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대흥군ㆍ예산현ㆍ덕산현 읍치의 진산과 주산
예산리(禮山里)를 소재지로 하여 군의 동북쪽에 위치한 읍으로 예산군의 중심 지역이다.
을 살펴보았다. 이들 진산과 주산은 지리지나 고지도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에게도 오랫동
1914년 등장한 통합 예산군의 12개 면 중 하나였던 임성면(任城面)이 1917년 예산면(禮山
面)으로 바뀌고 1940년 읍 승격으로 예산읍이 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예산현
안 지역의 수호신이자 상징적 표식으로 인식되어 왔다. 앞서 말했듯이 최근 전국의 여러 지
자체에서 지역의 장소 정체성 구성이나 역사 문화 자원 확보, 관광 마케팅 등의 차원에서 읍
현내면(縣內面) 지역으로 1895년 근대적 행정구역 개편 이후 예산군의 중심지인 읍내라 하
치를 중심으로 한 읍성, 동헌, 객사 등의 복원을 위한 기초 조사 및 관련 사업이 진행되고 있
여 군내면(郡內面)으로 되었다가 1914년 과거 예산현이 속했던 임존성ㆍ임성군의 이름을
2.지리와역사
73
72
내포의뿌리예산학
다. 그런데 이들 사업은 주로 읍치 공간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까지 살펴
산ㆍ주산을 확인할 수 없는 덕산현
보았듯이 지역의 실제적ㆍ상징적 중심으로서 읍치가 갖는 역사성이나 장소 의미는 읍치가
의 경우 『여지도서』와 『산경』 기록
기대온 진산 또는 주산을 배제하고 생각할 수 없다. 특히 최근 산지와 하천으로 대변되는 생
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읍치 서쪽에
태 환경 요소에 대한 관심이 부각되고 있는 상황에서 전통 도시 읍치의 진산과 주산은 도시
위치한 가야산이 진산이자 주산임
공간에서의 생태 환경 확보라는 차원에서 읍치 공간과 더불어 하나로 묶여져 접근될 필요가
을 알 수 있다. 『여지도서』에서 가야
있다.
산까지의 산 흐름을 보면 “가야산은
현 서쪽 10리에 있는데 대치로부터
5.지명
왔다.”, “대치는 현 서남간 15리에
있는데 덕숭산으로부터 왔다.”, “덕
숭산은 현 서남간 10리에 있는데 홍
1)예산군(禮山郡)
주 오서산으로부터 비스듬히 북쪽
1914년 기존의 예산군ㆍ대흥군ㆍ덕산군이 합쳐져 등장한 행정 구역으로 현재 충남 15
으로 뻗어 온다.”라고 하여 덕숭산
개 시ㆍ군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행정 구역상 군의 동부는 예산현, 서부는 덕산현, 남부는
으로부터 대치, 가야산으로 이어지
대흥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예산’이란 명칭이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개국 직후
는 산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인 919년(고려 태조 2)인데 태조의 후삼국 통일 과정 중 예산 일대를 포함한 삽교, 아산만 지
『산경』에서는 송악산→차유령(차동
역의 우호적 민심과 관련해 ‘예를 숭상하는 지역’이란 의미로 개칭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당
고개)→오서산→보개산→월산(홍
시 예산현(禮山縣)은 백제 임존성(任存城)이 신라 경덕왕 때 개명된 임성군(任城郡)의 속
[그림14]조선시대덕산현읍치의진산ㆍ주산인가야산(『1872년덕산군지도』)
성)→수덕산(현 덕숭산)으로 해서 가
현 중 하나로 『삼국사기』에는 백제시대 명칭이 오산현(烏山縣)이었고 경덕왕 때 고산현(孤
山縣)으로 바뀌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계속 예산현으로 유지, 1895년(고종
야산으로 이어지는 산 흐름과 가야
산 서술 내용에 “덕산 읍치가 동쪽 9리에 있다.”라 하여 결국 덕산현 읍치의 주산은 가야산
32) 근대적 행정구역 개편 때 홍주부(洪州府)의 예산군이 되었다가 1896년 충청남도 예산
임을 알 수 있다.(표 7) 더불어 앞서 말했듯이 여러 군ㆍ현에서 주산과 진산 개념이 일치되
군으로, 이후 1914년 대흥군ㆍ덕산군과 합쳐져 통합 예산군의 명칭이 되었다.
는 것으로 보아 주산인 가야산이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는 진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그
2)예산읍(禮山邑)
림 14)
지금까지 현 예산군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대흥군ㆍ예산현ㆍ덕산현 읍치의 진산과 주산
예산리(禮山里)를 소재지로 하여 군의 동북쪽에 위치한 읍으로 예산군의 중심 지역이다.
을 살펴보았다. 이들 진산과 주산은 지리지나 고지도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에게도 오랫동
1914년 등장한 통합 예산군의 12개 면 중 하나였던 임성면(任城面)이 1917년 예산면(禮山
面)으로 바뀌고 1940년 읍 승격으로 예산읍이 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예산현
안 지역의 수호신이자 상징적 표식으로 인식되어 왔다. 앞서 말했듯이 최근 전국의 여러 지
자체에서 지역의 장소 정체성 구성이나 역사 문화 자원 확보, 관광 마케팅 등의 차원에서 읍
현내면(縣內面) 지역으로 1895년 근대적 행정구역 개편 이후 예산군의 중심지인 읍내라 하
치를 중심으로 한 읍성, 동헌, 객사 등의 복원을 위한 기초 조사 및 관련 사업이 진행되고 있
여 군내면(郡內面)으로 되었다가 1914년 과거 예산현이 속했던 임존성ㆍ임성군의 이름을
2.지리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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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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