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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생유허비
홍주노은동성선생유허비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겸영경연사감춘추관사
송시열지음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겸동지경연사김상진씀
대광보국숭록대부행판중추부사유척기두전을씀
선생은 우리 세종대왕때의 명신으로 휘(諱)는 삼문이요 자(字)는 근보이다. 세속에 전하기
를 선생이 태어날 때 공중에서 아이를 낳았느냐고 세 번 물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삼문이
라 이름하였다 한다. 선생은 문종(文宗 : 조선5대 왕)과 노산(魯山)때에 역사(歷事 : 내려오며 섬기다)하
였는데 세조 병자년(세조2년 1456)에 단서(丹書 : 붉게 쓴 글씨로 단종복위문서)에 걸려서 그 아버지인
휘 승과 더불어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과 함께 죽으니 이들이 곧 세속에서
일컫는 육신(六臣)이다. 그 때의 죽임이 그 처노(妻努 : 부인과 종들)에까지 미쳐 도륙되고 멸문에
연좌된 자가 30여 가문이 되었으나 발길을 달리한 여러 자들은 안전한 부귀와 높은 영광이
여러 대에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여러 백년이 되었어도 사람들이 흠선하고 탄미하
며 경모하고 숭상하여 모두 이들의 죽음을 자기 몸으로 대신 백번이라도 바꾸고자 한 것은
도리어 이들에게 있고 저들에게 있지 않으니 어찌 사가(史家) 사마천이 이른바 그 중함이 저
와 같고 그 가벼움이 이와 같다는 것이 아니겠으며 어찌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본심을 하
늘이 다하도록 떨어지지 않아서 위무(威武)로도 녹일 수 없고 세리(勢利)로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아름답다! 선생은 창령인이다. 영락 무술년에 홍주 적동(홍주 노은리의
옛 이름)리에서 태어났는데 고을사람들이 그 집을 존숭하여 지금까지 돌아보아 기둥이 아무
탈없이 보존되었다. 마당에는 늙은 오동나무가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선생이 등제하
여 영광스럽게 돌아와서 잔치를 베풀 때에 그 가지에 북을 매달았다고 한다. 금상 9년(임금
숙종 1683)에 여흥 민공 유중(민유중 : 숙종의 장인이 요학자이며 관찰사였음)이 관찰사가 되어 이곳을 와
보니 나무는 늙고 집은 허물어져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황폐되어 쓸쓸한 것 뿐이고 오산
(烏山)이 곁에 우뚝이 서있어서 하늘을 떠받치고 냇물이 가로막은 형세가 있으므로 그 사람
됨을 상상하며 크게 우러르니 회포를 이기지 못하여 문득 돌을 세워 그가 살던 집을 표시
72_홍성의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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