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協) 때부터 조부는 원경기(元景器)까지 홍성에 살다가 아버지 원희손(元希孫)이 논산으로 이주하였다
가 원유풍에 이르러 탕정면 갈산리에 와서 정착하였다. 어머니는 청송심씨로 심용학(沈龍學)의 딸이
다. 부인은 전주이씨이며 이성선(李聖善)의 딸이다. 원유풍의 묘는 탕정면 갈산2리 여술에 있으며 후
손들은 탕정면 갈산리와 동산리 등지에 살고 있다.
[74] 강릉유씨 유득진
| 劉得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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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1660년대)의 문신이며 강릉유씨(江陵劉氏) 10세로 병사공파(兵使公派) 아산시 지역, 선
장면 죽산리 입향조이다. 선대는 충북 충주에서 거주하였으며 그는 충주에서 태어나 진천에서 성장
하였다. 아산시 선장면에서 살다가 현재 대전시에서 거주하고 있는 후손 25세(世) 유규상(劉奎相, 50
세)의 15대조이다.
유득진의 고조는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낸 병사공파 파조 유신주(劉信周)이고 증조는 성종14년
(1483)에 생진과에 합격한 성균진사 유표(劉豹)이며 조부는 군자감 직장 유세영(劉世英)이다. 아버지
는 선조35년(1602)에 무과에 급제한 후 통훈대부로 행군기시 판관을 지내고 진무원종공신에 녹훈된
유의남(劉義南, 1577~?)이다. 어머니는 하동정씨(河東鄭氏)이다.
유득진의 자는 여해(與海)이고 호는 당우(堂宇)이다. 집안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문과 급제 후
신창현감에 부임하면서 가족들이 선장면 죽산리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기적으로
보면 대략 350여 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의 부인은 김해김씨(金海金氏)이며 외아들 시한(始漢) 등 1남3녀를 두었다. 유시한은 부인 나주김
씨(羅州金氏) 사이에 흔손(欣孫) 등 1남1녀를 두었다. 예산현감을 지낸 유흔손은 밀양박씨(密陽朴氏)
와 혼인을 하였고 퇴임 후에 밀양박씨 세거지인 선장면 신동리에 들어가 살게 되면서 강릉유씨가 신
동리에도 퍼지게 되었다.
유득진의 묘는 선장면 궁평리 종산(당시 신창군 대서면‘당우산’
)에 있었는데 지난 2006년에 홍성
군 금마면으로 이장하여 모셨다. 그의 후손들은 선장면 죽산리와 신동리에 뿌리를 두고 당진군 순성
면, 우강면, 합덕 지역으로도 퍼져 살다가 선장면 간척사업이 시작되면서 현재의 선장면 돈포1,2리
에 집단 이주하여 세거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최근에는 대도시 지역에 많이 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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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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