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80페이지

73페이지 본문시작

[117] 조익
趙翼
<1579(선조 12년) ~ 1655(효종 6년)>
조선 중·후기의 문신·학자다.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옥풍군(沃豊君) 안국(安國)의 증손, 현령 간(侃)
의 손자, 첨지중추부사 형중(瑩中)의 아들이다. 서울에서 출생했고 경기도 광주가 고향이다. 어머니는 해
평(海平) 윤(尹)씨로 아산현감을 지낸 춘수(春壽)의 딸이다. 부인은 성주(星州) 현(玄)씨로 무과에 급제해
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현감을 지낸 덕량(德良)의 딸이다. 자는 비경(飛卿)이고 호는 포저(浦渚)·존
재(存齋)다. 장현광(張顯光)·이정구(李廷龜)에게 수학했고 퇴계의 제자인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윤
춘수·윤두수의 동생)의 문인이 되었으며 제자백가와 복서 등을 널리 공부했다.
임진왜란 중에 음직으로 정포만호(井浦萬戶)가 되고 1598년(선조 31)에 압운관(押運官)으로서 중국에서
군량미 23만석을 잘 운송한 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난 뒤 본격적으로 경사(經史) 중심의 학문에 전념해서
160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승문원정자를 시작으로 삼사의 여러 관직을 거쳤다. 1611년(광해군
3) 수찬(修撰)으로 있을 때 김굉필·조광조·이언적·정여창 등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주장하다가 정인
홍(鄭仁弘) 등의 반대로 좌천되어 고산도찰방, 이듬해에 웅천현감 등 외직에 나갔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
광주로 내려갔다.
1618년(광해군 10)에 인목대비가 유폐되고 영창대군이 사
사되자 처가가 있는 신창현의 도고산 아래(도고면 도산리)
로 들어와서 5년여 동안 은거하며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
다. 그는 이 때와 이 후 1637년부터 1648년까지 이곳에 머
물면서 신창에 살고 있던 권득기(權得己)와 박지계(朴知
誡), 그리고 온양의 조상우(趙相禹) 등과 교유하고 강론하
는 한편, 여러 제자들을 배출하여 우리 고장의 학문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다시 관직에 나아가 이조좌랑·사
<예산에 있는 도산서원 현판>
인·응교·홍문관직제학·승지·부호군·형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특히 대동법 폐지를 반대하다 파직되기도 했지만 이 후에도 대동법 충청도 확대 실시에 기여했
다. 1631년에 모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를 한 뒤 한성부우윤·대사간·이조참판·대사성·예조판서·대
사헌·공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예조판서로 있던 1636년의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실종된
아버지를 찾느라고 왕을 호종하지 못해 삭직·유배되었으나 효성에서 비롯된 일이고 뒤에 패잔병을 모아
적과 싸우며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고자 했음이 밝혀져 풀려나서 신창으로 돌아왔다.
이 후 이조판서·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아버지 봉양을 이유로 모두 사양했다. 아버지의 3년상 뒤인
1648년(인조 26) 좌참찬, 이듬해(1649년) 효종 즉위 후 우의정·좌의정·중추부판사를 거쳐 중추부영사
를 지내다가 1655년(효종 6)에 광주에서 77세로 졸했다.
양명학도 받아들였던 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과도 평생을 교유했던 그는 여러 학문에 두루 능통하
면서도 성리학에 정통했다.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주자(朱子)의 글을 고쳐 쓴《곤지록(困知錄)》
《중용주
해(中庸註解)》
《대학주해(大學註解)》
《서경천설(書經淺說)》
《역상개략(易象槪略)》등을 지어 왕(효종)
72

73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