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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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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만리를대표하는곳,구만포
구만리는 ‘구만 석의 가치가 들어오고 나간 곳’이라 구만리라고 했다는 지명 유래가 있
다.어떤경우는쌀구만석이생산되어포구를이용해외지로나가서구만리라고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지명유래는 호사가들의 이야기이다. 예전 일제강점기 때의 지도를 보면 삽
교천이 굴곡이 많은 하천이었다. 지금은 하천 개수공사로 곧게 잡혔지만 예전에는 그야말
로 구절양장이었다. 만자도 일만 만(萬)이 아니라 물급이 만(灣)자로 되어 있다. 구만(九灣)으
로썼는데이것은반드시아홉구비가아니라구비가많다는의미이다.1914년행정구역통
폐합이후구만(九萬)으로표기하여현재에이르고있다.
구만리는 마을 앞까지 조수가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포구가 형성되었고, 이곳에서 새우
젓배나고깃배가빈번하게출입하였다.또한이곳은역사적으로도유명했다.오페르트라고
하는독일상인이흥선대원군의아버지인남연군의묘를도굴하기위해삽교천으로들어와
배를 대고 상륙한 곳이기 때문이다. 도굴사건은 미수로 그쳤지만 역사적 사건에 구만포구
의지명을올리게된것이다.
새우젓배가들어오는가을철에는많은사람들이새우젓을사러몰려들었다.예산,홍선,
당진, 서산 등지에서 중간상인들이 몰려들었고 개별적으로 새우젓이나 생선을 구입하기 위
해 모여들었다. 그때는 돈으로 거래하던 시절이 아니라 곡식을 가지고 와서 물물교환식으
로거래를했다.사람이모이자자연스럽게가게도생기고술집도생겼다.새우젓배는대개
인천이나강화도,덕적도에서왔다.배가들어오면일단하역을하고판매하는사람을남겨
두고배는돌아갔다.
구만리지를 편찬하면서 얻은 큰 소득은 구만포의 사진이 발굴된 것이다. 그동안 말로만
전하던 구만포구의 모습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말로 하는 것보다 확실한 것은 사진자료
다. 황인선 선생이 사진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서 마을 회의 때 이야기를 했는데 마침
김춘도라는 분이 사진 이야기를 했다. 구만포 사진이 있다는 것이다. 김춘도씨가 제공한 사
진이 구만리지에 재재 된 것이다. 사진기가 없었던 시절로 1953년 촬영한 사진이다. 당시에
는 사진기도 흔치 않았고 사진을 찍더라고 인물사진 위주였다. 풍경이라든지 인물 없이 어
떤곳을찍는다는것은의외의일이었다.이사진은목적이있었던사진이다.개울가에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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