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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예산학 특강 - 禮山이 낳은 금석학자 秋史 金正喜 재조명
『동국여지승람』에서는 김생은 당나라 경운(景雲) 2년(711)에 태어났다고 하였다.
88)
『동국통감』에
김생이 평생토록 불경을 많이 써서 서법을 대성하였다는 것은 사전(史傳)이 전하는 바다. 「무구정
서는 당나라 정원(貞元) 16년(800)에 김생의 나이가 80세를 넘었다고 하였다. 또 노수신(盧守愼)의
탑원기」가 김생의 글씨라는 주장은 있을 수 있다. 다만 「원기」에 문성왕 17년(855)에 탑을 조성하였
『예성야록(?城野錄)』에서는 김생이 97세에 죽었다고 하였다.
89)
이로써 김생의 생몰연대를 대강 짐
다는 대목이 있는데, 김생(711~?)은 그보다 훨씬 이전 시기의 사람이므로, 「원기」의 글씨를 직접 썼
작할 수 있다. 그는 아무리 늦어도 애장왕(800~809) 이전 시기의 사람이다. 그런데, 김정희는 당
을 리는 없다. 김생의 글씨가 틀림없다면 집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필자의 판단으로는 김정희가
나라 대중 연간(847~860)에 이루어진 사경(寫經)을 김생보다 6~70년 이전에 나온 것이라고 하였
임모한 글씨(사진판: 별첨 참조)는 김생의 필체와 다른 것 같다. 왕희지체를 본뜬 전형적인 사경체(
다. 김정희는 과연 김생을 어느 때 사람으로 보았을까. 김생에 대한 역대 서화가들의 관심도에 비추
寫經體)다. 대방가의 감식과 고증이 필요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어 볼 때 연대 고증에서 문제가 있어 보인다.
김정희는 또 순조 29년(1829) 대홍수로 평양성이 무너졌을 때 외성인 구첩성(九疊城)에서 발견된
김정희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서자(書者)를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유홍준은 「무구정탑원기」
성벽의 각자와 앞서 영조 42년(1766)에 발견된 같은 성격의 각자
92)
를 탁본하여 고증하고 유희해에게
의 서자를 김생의 글씨라고 주장하였다.
90)
그 근거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유홍준은 창림사비의 글씨
보냈다. 김정희는 이 석각에 나오는 ‘기축(己丑)’년을 고구려 장수왕 37년(449)으로 비정하였다.
93)

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무구정탑원기」의 글씨를 같은 것으로 착각한 것 같다. 그러기에 그는 「무
것은 장수왕 15년(427)에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사실에 근거, 그 이후의 기축년으로 본 듯
구정탑원기」에 대해서도 “완당은 이것을 신라 김생의 글씨라고 고증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하다. 그러나 김정희의 고증은 잘못된 것이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할 때 처음 옮겨 온 곳은 지
원본은 일본인이 가져가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다”
91)
고 하였다.
금의 평양성이 아니고 그로부터 동북쪽 6~7㎞ 지점의 대성산(大成山) 일대였다.
94)
『삼국사기』에 의
하면, 고구려 때 평양성은 장안성이라고도 불렸다. 양원왕 8년(552)에 축조하기 시작하였고, 그로부
터 37년 뒤인 평원왕 28년(589)에 이곳 장안성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95)
그렇다면, 이 석각에 보이
는 ‘기축’년은 평원왕 11년(569) 이상으로는 더 올라갈 수 없다. 정견(正見)의 일루(一累)가 아닐 수
없다.
Ⅶ.맺음말
영·정조 시대 문운(文運)의 융성과 함께 청대 학풍의 정화(精華)에 접한 김정희는 실사구시적(實
事求是的) 학문 방법으로 경학은 물론 금석학에서 그 진면목을 잘 드러냈다. 24세 때의 연행(燕行)
은 학문하는 데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 옹방강·완원 등 기라성 같은 청대 학자들에게서 받은 학문
적 영향과 충격이 지대하였다. 입연 당시 김정희가 보고 들은 청대 금석학의 수준과 성과는 ‘충격’으
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김정희가 당대의 대석학들과 학연을 맺지 않았더라면 그의 학문 규모와
창림사무구정탑원기(김정희 임모, 동판)
92) 현재 알려진 평양성 석각은 모두 5종이다. 1766년 처음 발견된 이래 1829년(2종), 1913년, 1964년까지 계속 발견되었다. 
93) 『해동금석원』(영인본) 상권, 35쪽 “此刻出於丙戌(1766), 今六十四年(1829), 不可復覓, 又得一石於外城烏灘下. 與此小
88) 『동국여지승람』 권14, 충주목, 佛宇, 조 참조. 
異, 此云西向, 彼向東也. 小兄二字, 知爲高句驪古蹟無疑. 補書於此. 此己丑, 當爲長壽王後一千三百八十一年. 金正喜
89)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ⅩⅩ)』, 국역총서 156, 178쪽 참조. 
書.”; 1829-1380=449(己丑) 
90) 유홍준, 『완당평전』 1, 217쪽 참조. 
94) 關野貞, 「高句麗の平壤城及び長安城に就いて」, 『史學雜誌』 39-1, 1928; 『朝鮮の建築と工藝』, 岩波書店, 1941 재수록.  
91) 위와 같음. 
95)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陽原王 8년조 “八年 築長安城.”; 同 平原王 28년조 “二十八年, 移都長安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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