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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죽을 뻔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배하라는 명이 내려 거제(巨濟)에 위리 안치하게 되었다. 이 옥사에
이극건(李克健)·김원(金愿) 등 몇 사람이 또한 사련인(辭連人)으로 구속되어 모두 유배되었는데, 사적(事跡)이
없어져 기록하지 못한다. 】
라 적고 있다.
[73] 원주원씨 원몽성
| 元夢聖
<1687년(숙종13년)~1741년(영조17년)>
조선 후기의 인물로 원주원씨(原州元氏) 18세이며 시중공(侍中公)계 원산군-음성공파(原山君-陰城
公派) 아산시 지역, 음봉면 원남리 입향조이다. 현재 음봉면 원남리에 거주하는 후손 25세(世) 원도
상(元道商, 89세)의 7대조이다.
고조는 임진왜란 때 여주목사 겸 경기강원양도방어사로 순절한 원호(元豪, 1533∼1592)이고 증조
는 무과급제 후 지중추부사에 오르고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 3등 원계군(原溪君)으로 봉해진
원유남(元裕男)이다. 조부는 역시 인조반정(1623년)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좌의정까지 오른 원두표(元斗杓, 1593∼1664)이다. 원두표는
7남3녀를 두었다.
원몽성의 생부는 여섯째인 원만령(元萬齡)이고 생모는 전주최씨로 참판 최혜길(崔惠吉)의 딸이다.
둘째아들로 태어나 숙부(일곱째) 원만적(元萬敵)의 계자로 들어갔다. 계부 원만적은 승문원 제술관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우봉이씨(牛峰李氏)로 증참판 이건(李騫)의 딸이며 우봉이씨 음봉 신정리 입향조
인 이종직(李宗直)의 손녀딸이다.
원몽성의 자는 희숙(熙淑)이며 통덕랑에 올랐다. 부인은 양천허씨(陽川許氏)로 통덕랑 허장(許漿)의
딸이다. 집안에서는 그가 원남리로 들어온 것은 외가와의 인연으로 보고 있다. 시기는 대략 300년
전으로 본다. 그의 묘는 영인면 성내리에 있었으나 몇 년 전에 음봉면 원남리 납골당에 옮겨 모셨다.
그는 아들 명팔(命八), 명악(命岳), 명해(命海), 명기(命夔) 등 4남을 두었으며 이 중 첫째와 넷째는
계자로 가게 되어 실제 후손은 원명악과 원명해 형제만 남게 되었다.
원명악(元命岳)은 통덕랑에 올랐으며 부인은 청송심씨로 통덕랑 심노(沈櫓)의 딸이다. 2남2녀를 두
었으며 후손은 배방읍 중리와 수철리 일대에 자리 잡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원명해(元命海)는 남양홍씨 참판 홍정서(洪鼎
)의 딸과 혼인하여 1남2녀를 두었으며 후손들은 그
대로 음봉 원남리에서 옮기지 않고 세거지로 지금까지 유지해오고 있다.
한편 원몽성의 생부인 원만령(元萬齡)의 현손 22세(世) 원유풍(元有豊)은 증조 통덕랑 원몽협(元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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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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