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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山의
박안행(朴安行)(1578∼1656)
덕산현 장촌면 석곡리(현 응봉면 송석리)에서 살았다. 자는 성지(性之)이고 석곡(石谷)은
그의호이다.우암송시열(宋時烈,1607∼1689)의문인인제주목사박성석(朴星錫,1650∼
1709)의증조부이다.
형조참판을지낸광영(光榮)이고조이고증조조(藻)는별재(別提)요,밀성박씨큰세가를
이루는낙촌공파의파조낙촌박충원(朴忠元)이조부이다
조선중기의문신으로공의나이15세에왜란을만나가정이파산되고다만형님한분이계
셨으나장질부사에걸렸다.
가문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학문에 힘쓰며 자립의지를 세웠다. 1612년 광해군 임자년에 사
마시에합격하여이인창락도(利仁昌樂道)역찰방을했고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으로옮
겼다가다시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에승진되었다.
이때적신이이첨(李爾瞻)의공정치못한모략이있자곧바로벼슬을사직하고고향으로돌
아왔다.다시1624년(갑자년)에사헌부감찰에있다가익위사위솔(翊衛司衛率)을거쳐용
담현감(龍潭縣監)으로나가서고을백성들에게세금을관대하게하고위민정치를펴니아전
과백성들이편안했다한다.
그뒤에당진현감(唐津縣監)이되어도적을많이잡아백성의피해를덜어줬다.의금부도사
로 있을때 병자호란(1636년)을 당하자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갔다가 포로가 해제되자
곧벼슬을버리고고향응봉으로돌아와서벼슬을주어도부임하지아니했다.
은일(隱逸)로 청명(淸名)을 날리며 지내다 다시 벼슬부름이 있어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과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를역임했고최후에정선군수(旌善郡守)를했다.
안행은광해군때벼슬하면서고관들에게아부하지않고소신과원칙을지켜승진에연연하
지않고세도(世道)가밝을때도하위직에머물다병을핑계로벼슬을버리고고향석곡리에
묻혀시속을바로잡고사림을보양(保養)하는일을했다.
광해군이인목대비를폐할때모든관원이조정에모여폐비를주장할때안행은참여하지
않고오히려외직을청하였으나광해임금은한달이지나도록보류하고다른사람과마찬가
지로 은자(銀子:돈)를 바치도록 하자 “어찌 스스로 더럽히려고 하느냐”며 크게 탄식하고 마
침내외직을역임한사실을볼때안행의재주와지조가뛰어났음을알수있다.
우암송시열이약관(20세)의나이때역여(여관)에서안행을뵙자우암에게며칠을다정하
게지내주며“가르칠만한인물이다”며도덕적칭찬을해주었다고사후안행의묘갈명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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