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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원주원씨 원수심
| 元守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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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인물로 원주원씨(原州元氏) 20세(世)이며 참찬공파 아산시 지역, 신창면 가덕리 입향
조이다. 현재 탕정면 갈산2리에 거주하는 후손 33세(世) 원유철(元裕哲, 74세)씨의 13대조이다.
그는 한성서윤을 지낸 원자공(元自恭)의 현손, 현감을 지낸 원근례(元近禮)의 증손, 증이조참의 원이
(元?)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만포첨사를 역임한 원충량(元忠良, ?~?)이며 어머니는 확인되지 않는다.
원수심은 수경(守敬), 수선(守善), 수심(守心), 수의(守義) 등 4남2녀 중 셋째아들이다. 족보에는 첨
지중추부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증직일 것으로 본다. 부인은 전의이씨(全義李氏)이며 진사
이규석(李珪錫)의 딸이다. 동생 원수의가 공홍도 병마우후로 승진한 것이‘만력무오’즉 1618년(광해
군10년)이며 몇 가지를 고려하면 원수심은 1560대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대는 주로 경기도 광주에서 거주했으며 그가 신창으로 온 것은 임진왜란 때로 보아 410여 년 전
으로 추정한다. 집안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원래 보령 지역으로 가려고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
나 가덕리 가애 포구까지 밀려오게 되자 결국 그 근처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출
발했을 것으로 보이는 형 원수경 집안은 보
령 청라에 자리 잡았다.
원수심은 외아들 순거(舜擧)를 두었고 원순
거는 이건(以乾)과 이곤(以坤) 등 두 아들을
두었다. 원이건은 두 아들 세웅(世雄)과 세호
(世豪)을 낳아 점차 후손이 신창을 중심으로
온양, 탕정 등 인근 지역에 널리 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둘째아들 원이곤은 40세 때인
광해군 당시에 과거시험에서의 부정에 대해
상소하였다가 화를 입었는데 이를‘명륜소
-원수심의 묘비-
피화(明倫疏被禍)’
*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광해군 10년(1618년)에 사관(史官)이
【이곤(元以坤)이 일찍이 상소하여 과거(科擧)에서 농간을
부려 패거리를 부식(扶植)한 이이첨의 간악한 행동을 극력 진달하였다. 이에 흉악한 무리들이 그의 죄를 얽어
만든 뒤 계청하여 신국(訊鞫)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몇 차례에 걸쳐 형신(刑訊)을 받는 과정에서 장(杖)을 맞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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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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