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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조상우
趙相禹
<1582(선조 15년) ~ 1657(효종 8년)>
조선 중·후기의 학자로 온양에서 평생을 살았다. 본관은 양주(楊洲)이며 부사정(副司正) 눌(訥)의 손자
이고 부사과(副司果) 처옹(處翁) 지유(之柔)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평산(平山) 한(韓)씨로 첨지 적(積)
의 딸이다. 부인은 진주(晉州) 강(姜)씨로 첨지중추부사 죽창 주( )의 큰딸이며 6남 2녀를 두었다. 초명
은 학성(學聖)이고 자는 하경(夏卿), 호는 시암(時菴)이다.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고 예학에 정통하며 의리에 밝았다. 10여세 때부터 정자(正字)를 지낸 홍신민(洪信
民)에게 사사했고 뒤에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 되어 학명이 높았다. 1605년(선조 38)에 향시에 1
등으로 합격했지만 아버지의 병으로 복시(覆試)에 응시하지 않은 뒤에 과거 공부를 중단하고 온양에 머물
면서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다. 특히《주역》
을 애독했다. 서달산(설화산) 아래(아산시 장존동)에 석우정
(石友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당대의 학자들인 잠야 박지계(朴知誡), 포저 조익(趙翼), 동춘당 송준길(宋浚
吉), 신독재 김집(金集), 후천 황종해(黃宗海) 등과 강론하며 교유했다.
1625년(인조 3) 의리에 입각한 왕의 예에 관한 상소를 올려 인조의 생부를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
는 것에 반대했고 정묘호란 때 후금(청)과의 강화(講和)를 반대하는 척화상소를 올렸다. 1634년(인조 12)
에 그가 주도하여 박지계·조익 등과 함께 아산시 배방면 중리 점토곡에 정퇴서원(靜退書院)을 건립해서
정암(靜庵) 조광조와 퇴계(退溪) 이황을 배향했다. 서원 이름은 이 둘의 호에서 글자를 딴 것이고 마을 이
름이 그와 비슷하다고 해서 지은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당시에 전국적으로 전개된 동방5현(김굉필·정여
창·조광조·이언적·이황)의 문묘종사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이때 지역 유림의 대표로서 그가 지
은 서원 창건통유문(創建通諭文)과 상량문이 전해진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으며 부모가 병이 나면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확인했고 부모의
상을 당해 모두 3년간 여막(廬幕)에서 시묘했다. 효종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65년(현종 6) 왕의 온행(溫幸) 때 온양 생원 이문영(李文榮)이 그의 효행을
알리는 상소를 올려 아들 이숙(爾 )과 함께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 또한 온양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1670
년(현종11)에 아산시 배방면 중리 정퇴서원(靜退書院)에 추향되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시암집(時庵集)》
7권이 후손들에 의해 발간되었다.
그의 정려는 온양 장존리에 세워졌으나 뒤에 묘소가 있는 온양의 온천동 산18번지로 옮겼다. 그러나 지
난 2004년에 주거지(현대 홈타운 아파트) 개발로 모두 공주 유구로 이전되었고, 그 자리에 표석이 세워져
있다. 장존리에는 정문거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114] 조이병
趙爾炳
<1634(인조 12년) ~ 1683(숙종 9년)>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주(楊洲)다. 참봉 시암(時菴) 상우(相禹)의 다섯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진
주(晉州) 강(姜)씨로 첨지중추부사 죽창 주( )의 딸이다. 부인은 충주(忠州) 지(池)씨 성연(性淵)의 딸이
다. 자는 경장(景章)이며 아버지나 형들과 마찬가지로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1665년(현종 6)에 현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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