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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이되어진학반에편성된안대표는아버지가졸업한고대법대를목표로공부했다.

남,
그러나 꿈을 이루지 못하자 ‘꼭 대학에 가야만 하나?’라는 생각으로 후기 대학입시나 재


수를포기하고서울시공무원시험에응했다.15:1인가,경쟁률이꽤높았지만합격하여도


화동사무소에서근무를시작했다.마침예비군이창설되는바람에허드렛일이많았다.그


외에도아침일찍청소하랴,세금걷으러다니랴,민원인상대하랴,눈코뜰새없었다.이


거는아니다싶어재경직으로환직시험을거쳐성동구수도사업소로근무처를옮기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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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얼마 못 가 입영 영장을 받고 다시 고민했다. 이왕 군복무를 할 바에야 장교로 가
야겠다싶어직장에사표를내고마침대대적으로홍보하던육군3사관학교에입교했다.
이후일년동안혹독한훈련을받았다.단체구보중에열사병으로목숨을잃는동기생
도여럿있었지만,안대표는훈련과정을무사히마치고소위가되어최전방21사단에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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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받는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오지에다 소대원 중에는 문맹자도 많아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도 성실하게 근무하여 다시 연대군수장교로 발탁된다. 소위가 대위로 진급한 격이니
파격적대우를받은셈이었다.
그렇게 11년간의 군 생활을 하며 참으로 많은 경험을 했다. GOP 중대장 시절에는 3인
조대간첩소탕작전을지휘했다.그때우리아군도한명이희생되었는데,아들의사망소
식을 듣고 순천에서 달려온 부모의 의연하던 모습은 지금도 감동으로 남아있다. 정훈병
과 소령으로 근무할 때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중심에서 보도검열관으로 활동했다. 전남도
청 건물 2층에서 보도 기사를 검열했는데 점차 시위가 격렬해지며 급기야 시민에게 포위
되어 여러 가지 참혹한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대구 2군사령부 정훈참모부에서 정훈교육
을담당한일도소중한경험이다.예편하여호서대학교에서근무할당시광주일보사의월
간 《예향》 창간 15주년 기념 ‘쓰고 싶은 이야기’ 공모전에 그때의 생생한 체험인 「도발자
의최후와내란음모의전말」을써서우수상에당선,당시로선큰금액인상금100만원을
받기도했다.
군 생활의 어려운 와중에도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학사과정을, 단국대학교 대학원
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대학원에서 인사관리를 전공했는데 「고령화사회의 인력관리
에관한연구」로논문을쓴것이나중에문화사업하는데큰도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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