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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불과 30m정도의 거리를 두고 축조되어 있다. 성의 약 2/3는 평지에 축조되어 있는데 왕래할 정
도의 도로를 개착한 부분이 아마 원래의 문지(
)였던 듯하다. 성 길이는 약 600m에 달한다. 만들
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없으나 17세기의 중엽인 효종조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종
(1660~1674)대에 이흥덕이 첨절제사로 와서 이곳에 진을 친 것을 마지막으로 이 성이 폐성되었기 때
문이다. 성곽의 축조목적은 경상?전라?충청도의 이른바 삼남지방의 세곡 운반?저장을 감시하기 위
75)
해 쌓은 성이었는데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구도에서의 현지 증언을 채록하였다.
“ 왜정때는 한 45가구가 살았나요. 지금은 53호지요. 마루보시라고 일본말인데 왜놈들 연락선 회
사예요. 인천을 댕겼지요.'이레다시
‘라고 당일치기도 있고, 하룻밤 자고 오는 것도 있어요. 이틀이 한
번은 다니지요. 바람, 주의보 내리면 당연히 출항이 안되지요. 여기서 9시에 출발하여 4시반이면 도
착해요. 인천에서도 9시에 출발해서 4시간 30분이면 도착해요. 바람이 일면 5시간도 걸려요. 기계밴
데 굉장히 커서 몇 백명씩 타고 다녔지요. 180톤인가. 구도에서 고파도, 풍도, 여흥(영흥), 선재도, 월
미도 앞을 통과해서 하인천 부두에 닿았지요. 주로 장사꾼, 쌀장사, 마늘장사들이 짐을 싣고 인천상회
로 실어 날랐지요. 인천에서 여기로 오는 이들도 많았지요. 부모자식이 헤어져 사니까. 옛날에는 인천
으로 공부다니는 사람이 많았지요. 그때야 도시로 가서 공부했지요. 학구열, 그게 높았거든요.
해방되고서 개인배가 다녔지요. 인천에 있던 개인회사인데. 해방 전에는 해룡환이 다녔는데 풍도
앞에서 파손되서 200명이 죽었지요. 마르보시배가 해룡환이지요. 해방되고서 종호환이 다녔던가. 기
억이 가물가물하네요. 당시에 구도에는 주재소가 1군데 있었죠. 해산물 말고도 이북에서 감자 같은
것, 이북 원산에서도 오고 평안도에서도 옥수수, 감자, 고구마 같은 것을 가져다가 여기에 보관하곤
했지요. 일본애들이 마루보시회사 애들이란 농산물 들여오는 애들이랑 한통이지요. 여기서는 쌀,잡
곡 실어내가고, 인천에서 철물, 연장 같은 것을 공장에서 실어오고 서태안에 가져다팔고.
예전부터 구도라 불렀어요. 호리는 저 안쪽으로 들어간 동네를 말하구요. 구도 부두는 왜놈들이 만
든거예요. 방파제를 쌓은 거예요.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니지요. 연락선이 끊긴지는 육십댓살 때 벌써
끊기구요. 서산가는 찻길은 왜정때도 있었는데 차도 없이 서산까지 걸어서 2시간, 40리길이지요. 태
안보다는 주로 서산을 많이 다녔지요. 길이 좋으니까. 장을 볼때는 서산장을 보고, 태안장은 솔밭갈이
지요. 왜놈들 짐차가, 목탄차가 다녔지요. 서산장이 1.6일, 태안장이 2.7일, 그리구 해미장, 운산장이
있었지요. 옛날이 오히려 경기가 좋았지요. 인천, 서울사람들이 다 여기를 거쳐 갔으므로 여기가 중요
한 관문이었지요.
75) 박호삼(남, 74세, 농업, 구도 거주), 2005년 3월 12일 조사. 구도가 고향으로 평생을 구도포구에서 살면서 농사짓고 있다.
제보자의 집앞은 지금은 간척되었으나 얼마 전까지만해도, 즉 15-76년전만해도 자잘한 원막이로 만들어진 곳이다. 구도
일대는 계속 소소한 간척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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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osan.cult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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