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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조 노비들의 직조기술도 매우 정교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충렬왕 때에는 여승이
원성공주에게 백저포를 헌납하였는데, 그 직물이 섬세하고 꽃무늬까지 섞여 있는 화문저포
16)
였다.
이러한 화문저포는 한강변에 있는 암자의 여승의 우수한 직조기술에서 나온 것이고,
그 여승은 극세면포의 직조로 생업을 삼았다고 한다. 이로써 고려 말기의 사원 내에는 우수한
직조 기술의 전문가가 있어서 직조업이 사원경제에도 보탬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북도 육진 각군의 승처들이 짠 직물에는 발이내포라고 부르는 지극히 가늘고 섬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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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물이 있었다.
그 직물이 얼마나 얇은지 포 1필이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릿대 안에 들어갈 정도
였다고 하니 그 직조기술이 어느 정도로 우수하였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이렇게 수준 높은 화문저포의 생산은 충렬왕 때에 이미 명성을 얻고 있으므로 늦어도 13세기
중엽에는 그러한 문저의 직조기술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시기에 원의 황제 세조가
18)
고려의 기술은 중국인의 기술보다 훨씬 낫다고 하였다.
원의 황제까지도 높이 칭송하였고 또한
19)
원의 유명한 노래인 <어초기>에도 나올 만큼 고려의 모시포는 몽고인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20)
그리하여 충렬왕 10년(1284)에 직문저포를 원나라에 공물로 보냈고,
이후 고려에서는 문저
포를 중국에 계속 보냈으며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로 정리해 보았다.
<14세기 문저포에 관한 기록>
명 칭
암자의 여승이 제직
『고려사』
권89, 열전, 후비2조, 충렬왕
화문저포
충렬왕
직문저포
원나라에 보냄
『고려사절요』
권20, 충렬왕 10년 10월
원나라 황제가 요구
『고려사』
권34, 충숙왕 9년 7월
원나라 황제가 요구
『고려사절요』
권24, 충숙왕 9년 7월
원나라에 보냄
『고려사절요』
권24, 충숙왕 9년 8월
직문저포
충숙왕
원나라에 보냄
『고려사』
권35, 충숙왕 9년 9월
원나라에 보냄
『고려사절요』
권24, 충숙왕 9년 10월
원나라에 보냄
『고려사』
권35, 충숙왕 9년 10월
문저포
원나라에 보냄
『고려사』
권35, 충숙왕 16년 5월
직문저포
원나라 황제가 요구
『고려사절요』
권25, 충목왕 원년 4월
문저포
원나라 황제가 요구
『고려사』
권37, 충목왕 원년 5월
충목왕
직문저포
원나라 황제가 요구
『고려사절요』
권25, 충목왕 2년 3월
원나라 황제가 요구
『고려사』
권38, 공민왕 3년 5월
문저포의 공물면제요청
『고려사절요』
권26, 공민왕 3년 5월
공민왕
문저포
원나라에 보냄
『고려사』
권38, 공민왕 4년 5월
원나라 공납 면제됨
『고려사』
권38, 공민왕 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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