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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 순천(順天)으로 갔다. 남은 배 십여 척을 수습하고 흩어진 군사 수백 명을 모아
어란도(於蘭島)에서 적을 무찔렀다. 이때 조정에서는 수군은 약하다 하여 공에게 육
전을 명했다. 공은,
「적이 바로 전라도(全羅道)와 충청도(忠淸道)를 쳐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수군이 그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까닭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다할지라도 신이 죽지 않는 이상
적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아뢰었다.
호남의 피난선들이 여러 섬에 흩어져 있는 것이 100여 척이었다. 공이 그들과 약
속한 다음 진을 친 후방에다 늘여 세워 응원하게 하고 공의 배 십여 척이 앞에 나가
서 적을 벽파정(碧波亭)에서 맞았다. 적선 수백 척이 와서 덮쳐도 공은 동요하지 않
았다. 진용을 정돈하고 기다리다 적이 가까이 오자 총과 활을 한꺼번에 쏘아댔다.
군사들 모두가 죽기를 맹세하고 싸움에 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왜의 명장 마다
시(馬多時)의 목까지 베니 군의 위엄이 다시 떨치어졌다. 승첩한 공으로 계급을 높
여 상을 주려 하였으나 대간(臺諫)들이,
「이미 지위와 녹이 높다」
하고 반대하여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때 명(明)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서울에 있다가 글을 보내어 치하했다.
「근래에 와서 이런 승첩이 없었으므로 내가 직접 가서 괘홍(掛紅)하고자 하나 길이
멀어 가지 못한다.」
하고 백금과 붉은 비단을 보내어 표창하였다. 괘홍(掛紅)이란 중국 사람들이 폐백
으로써 축하하는 예식의 이름이다.
무술년(선조 31년, 1598년) 봄에 진을 고금도(古今島)로 옮겼다. 공이 모친의 상중
에 기용되어 군문에 종사하면서 날마다 몇 홉의 밥을 먹어 얼굴이 야위였으므로 조
정에서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방편을 따르라고 분부하였다.
이해 가을에 도독(都督) 진린(陳璘)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 백성을
성가시게 하므로 공이 군중에 영을 내려 군막을 뜯게 하니 도독(都督)이 달려와 물
었다. 공이,
「우리 군사와 백성들이 귀국 장수가 온다는 말을 듣고 마치 부모 기다리듯 하였는
아산의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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