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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예산학 특강 - 禮山이 낳은 금석학자 秋史 金正喜 재조명
또 비문에서 ‘단청흡어인각(丹靑洽於麟閣), 죽백훼어운대(竹帛毁於芸臺)’라고 한 구절을 가지고,
좌단에는 ‘김정희인(金正喜印)’이라는 인장(印章)이 찍혀 있다.
84)
모두 76자로 된 지어의 내용은 다
문무왕이 승하한 지 오래되었음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견강부회라 하겠다.
81)
위에
음과 같다.
나오는 인각은 죽백과 대우(對偶)를 이루는 것으로 ‘기린각(麒麟閣)’의 줄임말이다. 기린각은 중국
전한 시기 선제(宣帝)가 공신 11명의 초상화를 봉안했다는 전각이다. 세칭 공신각(功臣閣)이라고도
갑신년 봄에 석공이 경주 창림사 탑을 헐어, 내장(內藏)된 다라니경 한 축(軸)과 물건을 담는 그릇,
구리로 만든 둥근 덮개를 얻었다. 또 동판 한 개가 있었는데, 동판에는 탑을 조영한 사실을 기록하였
한다. 운대는 한나라 때 비서감(秘書監)의 별칭이다. 궁중에서 중요한 책을 수장하는 일종의 궁중
고, 동판의 뒷면에 탑의 조영에 관여한 관리들의 성명을 함께 기록하였다. 또 도금한 개원통보(開元通
도서관이다. 단청은 단서(丹書)
82)
와 청사(靑史)를 일컫는 말로 역사서를 가리킨다. 죽백 역시 서책(
寶)와 푸르고 누른빛의 번주(燔珠: 硝子玉)가 있었다. 또 거울 조각과 구리로 만든 받침대는 구리를 다
書冊) 내지 사책(史冊)을 달리 이르는 말로, 역사에 공훈이 기록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루는 사람[鑄銅者]이 없애버렸다. 두루마리의 표면은 누런빛의 비단인데 금으로 경도(經圖: 金泥變相
그렇다면 위의 말은 ‘단청은 기린각에 들어맞고 (공훈을 적은) 죽백은 운각에서 닳아질 지경이다’
85)
圖)를 그린 것이었다.
라고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영주(英主)다. 통삼(統三)에 공이 있
는 공신들을 공신각에 모시고 후세의 역사에 빛나도록 했을 것이니, 죽백에 기록된 저들의 공훈을
유명한 창림사비는 현재 원비(原碑)는 인멸되고 탁본마저 볼 길이 없다. 다행히 비편 하나가 국립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일찍이 원나라 때 명필 조맹부(趙孟?)가 「창림사비발미(昌林寺碑跋
되새기려는 후인들에 의해 책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라는 말이리라. 이렇게 새겨야 문리가 통한다고
할 것이다.
尾)」(『東京書堂集古帖』 所收)에서 김생의 필적임을 확인하고 찬양하였던 만큼
86)
그 실재와 서자(書
者)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기 어렵다. 그런데 김정희는 정육(鄭六)에게 보낸 서한에서 금자사경(金字
寫經)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Ⅵ.창림사寫經및평양성고구려石刻의고증
일찍이 동경의 폐탑(廢塔) 속에서 나온 묵서로 된 「광명다라니경(光明陀羅尼經)」을 본 적이 있다. 한
글자도 손상되지 않아 어제 쓴 것과 같았다. 이는 곧 당나라 대중(大中) 연간에 쓰여진 것이다. 김생보
김정희는 순조 24년(1824), 경주 남산 기슭에 있는 창림사지(昌林寺址) 삼층석탑이 석공에 의해
다 60~70년 이전에 해당된다. 필법이 매우 고아(古雅)하여 문무왕릉비,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 무
헐리는 것
83)
과 사리공(舍利孔)에서 유물이 나온 것을 목도하고 그 현장을 직접 조사하였다. 이 때
87)
장사비 등 여러 비와 갑을을 다툰다. 김생도 일주(一籌)를 양보해야 될 것이다.
유물로 사경(寫經)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과 동판에 음각한 「무구정탑원기(
無垢淨塔願記)」가 나왔다. 김정희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무구정탑원기」를 쌍구(雙句)로 임모(
臨模)하여 한 권의 서첩으로 엮고 서첩 말미에 발견 당시의 상황을 적은 지어(識語)를 남겼다. 여백
84) 「願記」의 원판은 현재 일본인 소장으로 알려져 있을 뿐 그 실물을 볼 수 없다. 본디 故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1864~1946) 박사가 소장하던 寫經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의 말미에 김정희가 雙句로 臨模한 「國王慶膺造無垢淨塔
願記」(4매)가 부록으로 실려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임모본조차 볼 수 없고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은 조
선총독부에서 경주 남산 일대의 佛蹟을 조사한 뒤 보고서 형식으로 펴낸 『慶州南山の佛蹟』(朝鮮寶物古蹟圖錄 第二,
1940) 17쪽에 실려 있다. 인쇄 상태가 좋지 않다.
[추기] 김정희가 동판에 임모한 「원기」 실물이 1968년 경기도 이천의 靈源寺에서 발견되어 오다가 용주사효행박물관에
기탁되었음이 최근 밝혀졌다(2012. 2. 28). 
81) 김정희는 이 대목을 ‘丹靑?於?閣, 竹帛毁於芸臺’로 판독, “초상화는 ?閣에서 색이 바래고 竹帛은 芸臺에서 훼손되었
85) 『慶州南山の佛蹟』, 16쪽 “甲申春, 石工破慶州昌林寺塔, 得藏陀羅尼經一軸, 盛銅圓套. 又有銅板一, 記造塔事實, 板背?
다”고 번역, 문무왕이 죽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비석은 승하한 지 불과 6년 뒤에 세워진 것이다. 이러
記造塔官人姓名. 又有金塗開元通寶錢, 靑黃燔珠. 又鏡片銅趺, 爲鑄銅者所壞. 軸面黃絹金?經圖.”; 황수영, 『한국금석
한 해석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洽’을 ‘?’로 판독한 점이 주목된다. 
유문』, 일지사, 1985, 149쪽에도 전재되어 있다.  
82) ‘丹書鐵券’의 준말. 임금이 공신에게 주는 붉은 글씨의 錄券. 붉은 글씨는 쉽게 지워지지 않으므로 자손 대대로 죄를 용
86) 徐居正, 『筆苑雜記』, 권1 “近見趙學士子?昌林寺跋尾曰: 「右唐新羅僧金生所書其國昌林寺碑. 字?深有典刑, 雖唐人名
서해 주겠다는 약속의 의미가 담겨 있다. 
刻, 未能遠過之也. 古語云, 何地不生才, 信然」 觀趙學士此跋, 金生筆法之冠絶古今知也.”; 『동국여지승람』 권21, 慶州
府, “昌林寺, …… 有古碑無字. 元學士趙子昻昌林寺碑跋云: ……”  
83) 석공이 무단으로 헐어서 유물들을 반출한 것인지, 아니면 官에 의한 해체공사였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일단 김정희가
참관하였다는 점에서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전직이든 현직이든 官人이 참관한 가운데 공공연하게 무단으로 석탑이 헐
87) 『완당전집』 권7, 21b, 「書贈鄭六」 “嘗見東京廢塔中所出墨書光明陀羅尼經, 一字不損, 如昨書者. 卽唐大中年間所書, 在
리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다.  
金生前六七十年以上. 筆法極古雅, 當與文武神行?藏諸碑甲乙, 金生亦當遜一籌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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