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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아깝게 세상을 떴으며 뒤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112] 조만영
趙萬永
<1776(영조 52년) ~ 1846(헌종 12년)>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양(豊壤)이고 이조판서 진관(鎭寬)의 아들이다. 효명세자빈 조씨(뒤에
조대비<趙大妃>)의 아버지로서 추존왕(追尊王) 익종(翼宗-효명세자)의 장인이며 영의정 인영(寅永)이 그
의 동생이다. 자는 윤경(胤卿), 호는 석애(石崖)다. 1813년(순조 1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지평·정
언·겸문학과 전라도 암행어사 등을 역임했다. 1819년 부사직(副司直)으로 있을 때 딸이 효명세자(孝明世
子)의 빈(嬪)이 되어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이조참의·금위대장·이조판서를 지냈다.
1827년(순조 27)에 사위인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고 이듬해에 그가 훈련대장을 겸하면서 풍양
조씨 세도의 기반을 마련했다. 1830년에 효명세자가 죽었지만 호조·예조판서·한성부판윤·판의금부사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세손(뒤의 헌종)의 보호에 힘썼다.
헌종(1834~1849 재위) 즉위 후 순원왕후 김씨의 수렴청정 하에서도 어영대장·훈련대장을 맡아 군권
을 장악한 채 동생 인영, 조카 병현(秉鉉) 등과 세력을 키워 나갔고, 1841년(헌종 7)부터 헌종의 친정이 이
루어지자 외척으로서 풍양조씨가 안동김씨를 누르고 확실하게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1845년 궤장(杖)
을 하사받고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저서《동원인물고(東
援人物考)》
등을 남겼고 글씨도 잘 썼다.
영인면 아산리 일대에는 조대비 전설이 있다. 아산리 양짓말(전에 피촌말)에 조만영이 내려와 터를 잡고
한동안 살았다고 한다. 그에게 딸이 한 명 있었다. 그 딸이 후원에서 글을 읽을 때 부엉이 우는 소리가 늘
‘부원군, 부원군’
이라 하는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알았다고만 말하고 다음 날 일찍 길을 닦고 황토를 펴
놓았다. 그 때 한양에서 사람이 와서 세자빈 간택 사실을 알렸으니 그의 딸이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빈이 되었으며 그도 딸과 함께 한양으로 다시 올라갔다. 효명세자가 왕이 되기 전에 죽어서 그녀는 세자
빈 신분에 그쳤으나 아들 헌종이 즉위한 뒤 효명세자가 익종(翼宗)으로 추존되자 익종비로서 왕대비가 되
었다. 1857년(철종 8)에 순조비가 죽자 대왕대비로서 왕실
의 최고 어른이 되었다. 안동 김씨를 몰아내기 위해 철종
말년에 흥선 대원군과 손을 잡고 1863년에 고종을 즉위시
킨 뒤 1866년까지 수렴청정을 하였으니 그녀를‘신정왕후
(神貞王后) 조대비’
라 부른다.
또한 영인면 신운리 구루물 일대의 상답이 그의 땅이었
다고 하며 영인면 아산리에는 그가 살아있던 1843년(헌종
9)에 세운 조만영 영세불망비(趙萬永永世不忘碑)가 있다.
아산현 관아 입구 근처에 세웠던 것을 1911년 현재 위치로
옮겼다.
<조만영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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