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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탕하고 술을 좋아했으며 시문(詩文)으로 당대에 이미 명성이 높았고 서예에도 뛰어났다. 사후에 이조판
서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동명집(東溟集)》29권을 남겼고‘아산8문장’
으로 알려져 있다.
[110] 조극선
趙克善
<1595(선조 28년) ~ 1658(효종 9년)>
조선 후기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한양(漢陽)으로 예산 봉산 출신이다. 곤(譴)의 증손, 흥무(興武)의 손
자, 경진(景璡)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진사 치림(致霖)의 딸이다. 자는 유제(有諸),
호는 야곡(冶谷)이다. 잠와(潛窩) 이명준(李命俊)에게 수학했고 이후 처가가 있는 신창에 왕래하면서 잠야
(潛冶) 박지계(朴知誡)와 포저(浦渚) 조익(趙翼)의 문인이 되었다.
1623년(인조 1)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동몽교관·종부시주부·공조좌랑을 역임한 뒤 은거하다가 다시
익위사사어·호조정랑·이조정랑 등을 역임했다. 이후 면천군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다가 사직하고 귀향
했다. 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기 위해 상경하다가 천안에서 적군에게 길이 막혀 포기하고
부모를 모시고 섬으로 피난했다. 그 후 여러 관직이 제수되어도 사양하다가 1648년(인조 26)에 온양군수
로 부임했다. 효종 때 좌의정 조익(趙翼)의 추천으로 성균관사업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강화부
사·순창군수·공조정랑 등을 모두 사양하고 학문에만 정진했다. 거듭된 부름에 1657년(효종 8)에 지
평·장령·선공감첨정을 거쳐 장령(掌令-종4품)이 되었으나 이듬해에 곧 병으로 세상을 떴다. 왕은 관원
에게 명하여 염습할 옷과 관곽을 내어 주라고 하였다. 뒤에 작성된 효종의 행장(行狀)에도 기록될 만큼 그
의 효행과 학행은 명성이 높았다. 스승 잠와와 포저 선생의 상에 심상(心喪)으로 기년(朞年)을 하였고 잠
와의 청백을 상언해서 포상을 받게 했다. 그가 온양에 있을 때 인조가 승하하자 죽만 먹고 짚으로 베개하
며 친상(親喪)과 같이 했다고 한다.
1665년(현종 6)에 효자 정려가 내려졌고 효열비가 세워져서 그의 고향에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듬해에
이조참의에 추증되고 문목(文穆)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후손에게 구휼미가 내려지기도 했다. 늘 간절
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학문을 연마하고 실행했던 그는 특히 예학에도 밝았으며 ≪야곡집(冶谷集)≫ 10권
과 ≪야곡삼관기(冶谷三官記)≫ 등을 남겼다. 1720년(숙종 46)에 그의 스승 조익이 배향된 신창(新昌) 도
산서원(道山書院)에 추배되었고 덕산(德山) 회암서원(晦庵書院)에도 배향되었다. 묘는 그의 고향인 예산
군 봉산면 시동리에 있다.
[111] 조내양
趙來陽
<1614(광해군 6년) ~ 1651(효종 2년)>
조선 후기의 학자다.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대학자 포저(浦渚) 조익(趙翼)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성주
(星州) 현(玄)씨로 현감 덕량(德良)의 딸이고 부인은 연안(延安) 이씨(李)로 좌의정 시백(時白)의 딸이다.
자는 장길(長吉)이고 호는 아버지와 함께 살던 신창 도고의 지명을 따서 도산(道山)이라 했다. 한동안 야
곡 조극선(趙克善)에게 수학하기도 했다. 1633년(인조 11)에 진사과에 급제했으나 얼마 뒤 병자호란으로
강화가 성립되자 벼슬에 대한 뜻을 접고 시골에 내려와 문장과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38세의 젊은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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