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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예산학 특강 - 禮山이 낳은 금석학자 秋史 金正喜 재조명
Ⅴ.재발견한문무왕비의건립연대
필자는 『해동비고』를 직접 본 적이 없다. 여러 신문 등에 소개된 기사를 토대로 문무왕릉비에 대
한 김정희의 고증을 살펴보면, 무엇보다 건립 연대에 관한 것이 눈길을 끈다. 김정희는 비의 말미에
보이는 ‘이십오일경진건(二十五日景[丙]辰建)’
75)
이라는 문구를 근거로 건립 연대를 687년 8월 25일로
김정희는 『해동비고』에서 순조 17년(1817) 문무왕릉비를 ‘재발견’했다고 밝혔다. “경주에서 고적을
비정하였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문무왕비릉가 신문왕 2년(682) 7월 25일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찾다가 낭산(狼山)의 남쪽 기슭, 선덕왕릉 아래 신문왕릉 앞에 있는 어느 밭 돌무더기를 파헤쳐 문
왔다.
76)
무왕릉비 아래쪽을 찾았다. 비석은 없어지고 받침돌뿐이었다. 또 비신(碑身) 일부분이 풀 속에 있
김정희의 고증은 사리에 비추어 상식선에서 접근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요약하면, 이 비는 문
었는데 문무왕비의 하단부와 딱 맞아 떨어졌다. 나머지 없어진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무왕이 죽은 뒤 사왕(嗣王)인 신문왕의 재위 기간 중(681~692)에 세워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홍양호의 「제신라문무왕릉비」에 따르면, 문무왕릉비는 정조 20년(1796) 무렵 경주에서 한 농부가
비문 중에 ‘국학소경(國學少卿)’이라는 관직명이 있으므로 신문왕 2년(682) 국학을 설치한 이후에
밭을 갈다가 처음으로 발견하였다고 한다. 전·후면으로 글을 새긴 능비는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이
세워졌을 것이다. 또 ‘천황대제(天皇大帝)’라는 당나라 고종의 시호
77)
가 나오므로 고종의 장사를 지
비는 그 뒤 자취를 감추었다가 김정희에 의해 그 아랫부분이 다시 발견되었고, 또 다시 행방이 묘연
내고 시호를 올린 뒤인 684년 8월 을해일(乙亥日) 이후라야 된다. 결국, 684년 8월 이후부터 692년
했다가 1961년 경주 동부동의 어느 민가에서 댓돌로 쓰던 것이 재발견되었다.
74)
유희해의 『해동금석
7월 신문왕이 세상을 떠나기 이전까지를 대상으로 연대를 추정할 수밖에 없다. 김정희는 중국측 고
원』에서는 상부와 하부를 각각 전·후면 2개씩으로 나눈 4장의 탁본에 근거하여 판독을 하였다. 이
사서(古史書)에 근거하여
78)
이 기간의 삭윤(朔閏)을 조사, ‘687년 8월 25일 혹은 9월’로 추정하였다.
탁본이 청나라에 건너간 경위는 분명하지 않지만 역시 김정희와의 관련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것은 현대의 역법 추산으로도 뒷받침된다. 683년부터 692년 7월까지를 대상으로 할 때 ‘25일 병
진일’에 합치되는 경우는 687년 8월과 10월뿐이라 한다.
79)
김정희의 고증은 일견 정밀하여 종래 학
계의 통설에 대해 재검토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김정희가 건립 연대 고증에 중요한 단서로 들었던 것은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김정희는
‘천황대제’를 당나라 고종의 시호로 단정했지만 꼭 그런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천황대제라는 말이
나오는 문장의 앞 뒤가 떨어져 나가 ‘?□□□天皇大帝’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전후 맥락이 끊겨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당 고종의 시호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천황대제는 도교에서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 원시천존(原始天尊) 이전의 최고신(最高神)이다. 북
극성을 신격화한 것이기도 하다. 후한 때 정현(鄭玄)이 유교의 최고신인 호천상제(昊天上帝)와 동일
시한 이래, 우주의 최고신이 되어 역대의 왕조에서 제사되었다.
80)
위 대목은 문무왕의 승하와 관련
된 것으로 보이는 만큼, 오히려 ‘천황대제의 부름을 받아 하늘로 올라갔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75) 당나라 高祖의 皇考의 諱가 昞이다. 음이 같은 ‘丙’자를 피해 ‘景’자로 쓰도록 하였다. 
76) 金昌鎬는 『二十史朔閏表』 등을 동원, 682년 7월 25일로 비정하였다. 김창호, 「문무왕릉비에 보이는 신라인의 조상인
식」, 『한국사연구』 53, 국사편찬위원회, 1986 참조. 
77) 고종 咸亨 5년(674) 8월에 황제의 칭호를 ‘천황’, 武后를 ‘天后’라 하였다(『구당서』 권5, 高宗本紀 下, 咸亨 5년 8월조).
그러나 ‘천황대제’란 명칭은 『당서』 「고종본기」에 단 1회 보일 뿐이다. 
78) 김정희의 서한을 보면, 『春秋朔閏表』, 『춘추경전삭윤표』 등 삭윤에 관한 저서 이름들이 나온다. 『추사와 韓中交流』, 과
천문화원, 2007, 37~38쪽 참조. 
79) ≪조선일보≫, 2007년 1월 7일자 참조. 
74) 현재 아랫부분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80) 金勝東(편), 『道敎思想辭典』, 부산대학교출판부, 1996, 10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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