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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해주오씨 오윤성
| 吳允誠
<1576년(선조9)~1652년(효종3)>
조선 중후기의 문신이며 해주오씨(海州吳氏) 14세(世)로 서하공파(西河公派)의 파조이자 아산시 지
역 입향조이다.
어모장군으로 행용양위 부사과를 지낸 오계선(吳繼善)의 현손이자 석성현감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오옥정(吳玉貞)의 증손이고 사헌부 감찰에 오르고 좌찬성에 증직된 오경민(吳景閔)의 손자이
아버지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은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으나 큰아들이 높은 관직에 오르자 선
공감역에 제수되고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오희문은 1591년 11월부터 1601년 2월까지, 임진
왜란 전후의 시기에 겪었던 여러 일들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쇄미록( 尾錄)」7책을 남겼다. 보
물 제1096호(1991.9.30)로 지정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그는 모친상을 당하자 70세의 고령
임에도 불구하고 죽만 먹으며 3년간 여묘(廬墓)를 하여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칭송을 받았다. 어머
니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이며 문천군수 이정수(李廷秀)의 딸이며 성종(成宗)의 왕자인 익양군(益陽
君)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오윤성은 4남 중 넷째로 태어났으며, 영의정에까지 오른 오윤겸(吳允謙. 1559-1636)은 그의 맏형
이다. 그의 자는 여일(汝一)이고 호가 서하(西河)이기 때문에 집안에서는‘서하공’
으로 칭한다. 중훈
대부(中訓大夫)로 진천현감을 지냈다.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지평 이충성(李忠誠)의 딸이다.
이충성이 거주했던 곳이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으나 신창면 가덕리이거나 인접한 곡교천 건너 지역
(염치읍 강청리~중방리)으로 추정된다. 이충성의 형제들, 그리고 오윤성 등이 함께 곡교천 범람원
지역을 개간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선대는 주로 경기도 광주와 서울 지역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왜란을 당하여 아버지 오희문 등 가족
과 함께 충남 부여 임천에 피난하였던 바, 그곳에서 역시 피난 와 있던 전주이씨 이충성 집안과 만나
오윤성이 금강 건너 함열에서 혼인식을 올렸다. 또한 예산에는 고모가 살고 있어서 예산에도 머물렀
고 신창을 거쳐 올라가 맏형이 현감으로 근무하게 된 강원도 평강에서 약 5년간 머물기도 했다. 그가
처가 인근인 신창면 신달리에 정착한 것은 병자호란(1636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대략 370년
전의 일이다. 셋째 아들 달삼이 그를 모시고 신달리에 살았다. 그와 그의 후손들 묘소는 공주시 유구
면 신영리 여든리(팔십리)에 마련한 선산에 모셔져 있다. 참고로, 병자호란 때의 유명한‘3학사’중
한 명인 오달제(吳達濟)는 실질적으로 그의 조카이다.
오윤성은 달관(達觀), 달현(達賢), 달삼(達三), 달영(達榮) 등4남1녀를 두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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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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