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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으며 이듬해에는 옥루(玉漏)를 만들었다. 1441년에는 세계
최초로 측우기와 수표(水標)를 만들어 상호군(上護軍-정3품)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442년(세종 24년)에 측우기를 개량·완성
하여 지방 관청에도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그 해에 왕
이 종묘 행차에 탈 가마를 새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부숴지자 그
죄로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이후 행적
은 전해지지 않는다.
장영실의 실제 묘는 전하지 않지만 1988년에 아산 장씨 문중에
서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 있는 시조 서(壻)의 묘 아래에 그의
가묘(假墓-허묘)를 조성했고 2006년에 다시 새롭게 정비해서
그를 기리고 있다.
<장영실 묘 옆에 있는 추모비>
[108] 정덕호
鄭德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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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온양(溫陽)이며 이조판서 포(袍)의 후예다. 자는 치관(致寬)이고 호는 취송
(翠松)이며 문장과 행의(行義)가 있었고 절개가 높았다. 1894년(고종 31)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종2품)에 올랐고 80세까지 살았다.
[109] 정두경
鄭斗卿
<1597(선조 30년) ~ 1673(현종 14년)>
조선 후기의 문신·문인·학자이며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시인으로 이름이 있던 지승(之升)의 손자이
고 아버지는 호조좌랑 회(晦)이며 어머니는 광주(光州) 정(鄭)씨로 장령 이주(以周)의 딸이다. 글과 도학으
로 이름이 높던 염( )과 작( )은 그의 종증조부다. 자는 군평(君平), 호는 동명(東溟)이며 이항복(李恒福)
의 문인이다.
이미 14세 때 별시(別試) 초선(初選)에 합격해서 이름을 날렸고 관직에 나아가지도 않았던 1626년(인조
4)에 문학으로 유명한 중국 사신을 접대하기도 했다. 1629년(인조 7)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부수찬·
정언·직강 등을 역임했다. 1636년(인조 14)에 전년에 있었던 진위향교 중수 요구에 소홀히 한 일로 탄핵
을 받고 파면되어 오랜 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완급론(緩急論)>을 지
어 군비 강화를 제창했으며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청에 대한 척화와 강화로 의견이 대
립되었을 때 10개조 상소와‘어적십난(禦敵十難)’
을 지어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1643년
(인조 21)부터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효종 즉위(1649년) 후 부수찬·부교리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했다. 이듬해인 1650년(효종 1)에 교리(校理)로서 왕의 도리를 풍시(諷詩) 20편으로 지
어 올려 왕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은 일은 유명하다. 1669년(현종 10)에 홍문관제학을 시작으로 예
조참판 ·공조참판 겸 승문원제조 등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노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성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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