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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나 하였다. 중추부와 돈령부에서 판사와 영사를 하고 그 사이에 과
거도 주간해서 인재를 많이 얻기도 하니 문관이 아니면서도 붓을 잡
게 된 것은 특례이다. 통리기무아문을 신설함에 명령해서 총리대신을
간섭하게 했고 도상으로서는 태묘와 주원·약원·역원·금위·훈국·무위영
과 애경사도감에도 권차하였으니 상으로 내린 말이나 문표임자의 은
전을 번더해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임오년에 특별히 광주유수를 제수하였다. 6월 10일에 있었던 군난
은 큰 변고이다. 훈련원 반졸들이 병기를 가지고 와서 공의 집을 에
우니 때는 아직 새벽이었다. 공이 급히 침실에서 일어나 놀래고 분하
게 여겨 기운이 막히었다. 운현궁으로 옮기었고 임금이 어의를 보내
약을 쓰고 간호하였으나 마침내 이 날로 돌아가니 향수가 68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은 진도하고 조회를 멈추었으며 슬퍼하는 전교
를 별도로 내리고 부의도 하후게 하사하며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지
체하고 중관들에게 명령해서 상례를 치르게 하고 시장도 기다리지
않고 시호를 의론해서 효헌이라 했다가 또 특별히 전교를 내려 시호
를 충익으로 고치니 몸을 위태롭게 해서 위를 받듦을 충이라 하고
사려가 깊고 원대함을 익이라 하였다. 때는 마침 시끄러움으로 다음
달 용산방에 장례지내고 갑신년에 대흥군 우정리 신좌원으로 옮기었
다. 배위 증정경부인 안동권씨는 진사 희인의 따님이고 배위 증정경
부인 연일정씨는 현감 명원의 따님이니 모두 자녀를 두지 못하였고
배위 정경부인 안동김씨는 만근의 따님이니 세 배위가 모두 공과 함
께 옮겨 합폄하였다. 김부인이 1남을 낳았으니 재긍이니 예조판서로
시호가 헌간이며 나이 겨우 25세에 공보다 먼저 요서하여 소생이 없
고 광흥령 희하의 아들 은용을 취해서 후사를 삼았다.
66 예산군지(19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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