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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장서
蔣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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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의 인물로 아산(牙山) 장(蔣)씨 시조(始祖)이다. 장영실(蔣英實)의 선조라 알려져 있다. 중국의
북송(北宋, 960 ~ 1126) 말기에 여진족의 금(金)나라가 중원을 압박할 때 당시 금좌광록대부 신경위 대장
군이었던 그가 금을 정벌하자는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배를 타고 고려로 망명해서 지금의 아산시 인
주면 문방리 지역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 이를 전해 들은 왕(예종)이 그에게 식읍(食邑)과 아산군(牙
山君)이라는 봉작(封爵)을 하사했다고 한다. 그 후 자세한 내용은 불확실하나 이로 인해 그의 후손들이 아
산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아산 장씨 집안의 자료에 따르면 그의 증손 숭(崇)은 고려조에 판군기감사 겸
도총사를 역임했고 숭의 아들 득분(得芬)은 도총사를 거쳐 판군기시사에 올랐다. 6세손 균(均)은 판도판
서에 올랐으며 균의 아들 자방(自芳)은 삼사부사 겸 검교예빈
경을 역임했는데 거주지는 경북 의성군 점곡면 교동이다. 자방
의 아들 5형제가 모두 전서(典書)를 지내‘5전서’
로 유명하다.
후손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은 조선 세종 때의 장영실(將英實)
이다.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 장장군묘(蔣將軍墓)라는 큰 무덤이
있다. 일찍이 멸실되었던 것을 후손들이 묘소 자리를 다시 찾
아 토지를 매입하고 1967에 그 자리에 있던‘장장군 신사’
는 신당을 헐고 봉분을 만들었다. 이 후 2006년에 지금의 모
습으로 재정비했다.
<장서의 묘>
[107] 장영실
蔣英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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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세종 때의 과학·기술자다. 본관은 아산(牙山)으로 출생과 내력은 명확하지 않다. 아산 장씨
7세손 자방(自芳)의 이른바‘5전서’아들 5형제 중 셋째 아들 성휘(成暉)가 조선왕조 개창에 반대하다 역
적으로 몰려 관노가 되었는데 그 성휘(成暉)가 아버지라 하기도 하고, 중국계 귀화인과 동래현 관기 사이
에 태어났다고도 한다. 그가 동래현의 관노(官奴)였던 사실만 확실하다. 1421년(세종 3)경에 특출한 재주
가 세종에게 알려져 그를 내감(內監)에 불러들였고 얼마 뒤 중국에 파견되어 천문기기를 연구하고 이듬해
에 돌아왔다. 귀국 후(연려실기술에는 세종 7년) 천민 신분에서 벗어났고 그 다음 해인 1423년(세종 5)에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에 임명되어 궁중 기술자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듬해인 1424년에 물시계를 만들고 그 공으로 정5품 사직에 올랐으며 이 후 정인지(鄭麟趾)·이천(李
)·정초(鄭招) 등과 함께 7년 동안의 노력으로 간의(1432년)를 만들었다. 이듬해에 혼천의(
渾天依
만들고 호군(護軍)에 올랐고 그 다음 해인 1434년(세종 16)에 새로운 활자인 갑인자(甲寅字)와 함께 그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되는 자격루(自擊漏)를 완성했다. 그 공으로 그는 대호군(大護軍-종3품)으로 승차했
다. 1437년에는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만들어 거리에 설치했고 현주일구·천평일구·일성정시의 등도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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