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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예산학 특강 - 禮山이 낳은 금석학자 秋史 金正喜 재조명
이 무장사비는 찬자와 서자를 기록하는 도입 부분이 ‘□守大奈麻臣金陸珍奉敎’라고만 되어 있다.
‘奉 敎’ 이하가 탈락하여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한 줄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단 ‘봉교찬
병서(奉敎撰幷書)’일 가능성이 있다. 글씨 쓴 이를 비문의 마지막 부분에 쓰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
만,
71)
이 비의 경우 말미 부분에서 찾을 수 없다. 이 점은 김정희가 서자를 고증하는 데 참고 사항
이 되었을 것이고, 여기에 글씨에 대한 감식이 병행되어 ‘집자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듯하다.
결국 김정희는 김육진이 왕희지체를 본떠서 쓴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 같다. 유희해의 『해동금석
원』에서 김육진의 ‘찬병서’라고 한 것은 김정희의 견해를 대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72)
김정희의 견
해는 위에서 말한 홍양호의 견해와 전적으로 부합한다. 홍양호가 사계의 선배이자 권위자인 만큼
그의 견해를 중요하게 참고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73)
김정희가 옹방강의 집자설을 수용하지 않고 신라사람 김육진이 왕희지체를 본떠서 쓴 것으로 본
것은 그의 공정한 안목과 강한 주체성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김정희의 주체적 관점은 1914년에
를 집자한 「집왕서삼장성교서비(集王書三藏聖敎序碑)」의 행서가 뒤섞여 사용된 집자비로 단정하고,
제3의 비편이 발견됨으로써 빛을 발하게 되었다. 찬자와 서자(書者)에 대한 정보를 담은 제1의 비편
“함통(咸通)·개원(開元) 이래 당나라 사람들이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했는데 다른 나라에서도 복습(
(홍양호 발견) 도입 부분은 본디 앞뒤가 잘린 채 “……□守大奈麻臣金陸珍奉 敎□□”운운하는 대
服習)할 줄 알았다. 집자에 사용한 난정첩(蘭亭帖)의 글자가 모두 정무본(定武本)과 합치된다”고 하
목만 남았었다. 그런데 1914년에 발견된 제3의 비편을 그 뒤로 맞추니 문장이 이어졌다. 즉, ‘奉 敎
였다.
68)
□□’에 이어 ‘□□□皇龍……’ 운운하는 대목이 잘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서자(書者)를 추정할
김정희는 이 무장사비에 대해 “과시 홍복사비(弘福寺碑)의 글자체요 인각사비와 같이 (왕희지의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정보다. 홍양호나 김정희 당시에 제3의 비편이 발견되었다면, ‘황룡’ 운운한 것
글씨를) 집자한 것이 아니다. 김육진은 신라 말엽의 사람인데 비의 연대는 지금 상고할 수 없다”
69)

을 그냥 보아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서체를 말하는 가운데 김육진을 언급하였지만 서자(書者)로 못박지는 않았다. 다만 분명한
필자는 이와 관련하여, 무장사비의 글씨를 쓴 사람을 ‘황룡사 스님’으로 추정한 바 있다(제6장 참
것은 집자가 아니라고 한 점이다. 따라서 글씨를 쓴 사람이 홍복사비를 본받아 썼다는 것이 김정희
조). 돌이켜볼 때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글씨에 뛰어난 스님이 금석문을 쓰거나 집자를 한 예는 적
의 생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난정서」와 「성교서비」를 뒤섞어 집자한 것이라고 한 옹방강
지 않다. 이를 본다면 ‘皇龍’ 이하 떨어져나간 대목은 ‘皇龍寺僧(沙門)??書’일 가능성이 높다. 혹은
과 견해 차이를 보인다.
‘皇龍寺沙門??奉敎書’일 수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제6장을를 참조하기 바란다.
글씨 쓴 사람을 밝히는 데는 우선 사리에 비추어 상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통삼(
統三) 이전부터 신라에서 각종 비가 세워졌고 나중에는 선승(禪僧)의 탑비가 주를 이루었다. 비문
들을 보면 대체로 표제(標題)가 먼저 나오고, 찬자(撰者)라든지 서자(書者)의 직함과 이름이 이어진
다. 본문이 시작되는 것은 그 다음이다. 표제와 찬자·서자는 각각 행을 바꾸어 쓰며,
70)
찬자와 서자
가 같은 사람일 경우는 한 줄로 ‘…… ???찬병서(撰幷書)’라고 하는 것이 관례였다.
68) 『해동금석원』 附錄 卷上, 「唐?藏寺碑」, “碑行書雜用右軍蘭亭及懷仁大雅所集字, 蓋自咸亨·開元以來, 唐
人集右軍書, 外國皆知服習, 而所用蘭亭字, 皆與定武本合, 乃知定武本實是唐時所刻, 因流播於當時耳.”(영인본 하권,
71) 문무왕릉비가 대표적이다. 말미에 건립 연대를 쓰고 이어 ‘大舍臣韓訥儒奉□□’이라 하였다. ‘奉□□’는 ‘奉敎書’일 것이다. 
1010∼1011쪽)  
72) 추사학단의 한 사람인 이조묵의 『羅麗琳瑯攷』에서는 “新羅?藏寺碑, 守南大令金陸珍撰幷書, 碑文行書, 鸞飄鳳泊 , 煊
69) 『완당전집』 권4, 35b~36a, 「與金東籬(其一)」 “?藏碑果是弘福字體, 非集字如麟角碑矣. 金陸珍是新羅末葉之人, 而碑
赫動人.” 운운하였다. 
之年代, 今不可考矣.” * 弘福寺는 興福寺라고도 불린다. 
73) 이종문은 홍양호·김정희 등 조선조 금석학자들의 언급을 종합한 뒤 김육진의 글씨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을 내린 바
70) 刻手(刻者)까지 기록하는 경우가 있다.  
있다. 이종문, 「무장사비를 쓴 서예가에 관한 고찰」, 『남명학연구』 13,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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