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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돌아왔다. 그러다가 갑술환국(1694년)이 이루어진
뒤 다시 병조참의 등을 지내다가 1697년(숙종 23)에 동
지중추부사(종2품)에 제수되었다. 한성부윤·충청도관
찰사·병조참판·공조참판 등을 거쳐 1699년(숙종 25)
도승지에 제수되었고 그 후에도 여러 관직을 거쳐 1715
년(숙종 41)에 자헌대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정2품)
에까지 오르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었다.
강직한 성품으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문장과 글
씨로 명성을 떨쳤고 경사(經史)에도 정통하여 학명이 높
았다. 81세에 졸하였으며 1871년(고종 8)에 효정(孝貞)
<임홍망의 묘>
시호가 추증되었다. 문집으로《죽실집》2책이 남아 있
다. 묘는 아산시 염치읍 동정리 독정촌(독정이)에 있으며 당대의 학자인 미호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이 찬한 묘갈이 있다. 1858년(철종 9)에 염치읍 동정리에 건립되었던 독성서사(獨醒書社)가
1868년(고종 5)에 철폐되었던 바, 2004년에 후손들이 독성서원(獨醒書院)으로 복설할 때 그도 추향(追
享)되었다.
[105] 임희지
任羲之
<1568(선조 1년) ~ 1637년(인조 15년)>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으로 풍천 임씨 아산 염치 죽실 입향조(入鄕祖)다. 풍천 임씨는
본관인 풍천을 별칭으로 서하(西河)라고도 한다. 그는 풍천 임씨 17세이며 관찰사를 지낸 명신(名臣) 내신
( 臣)의 손자, 진사(進士)로서 대흥현감을 지낸 기(琦)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李)씨 판관 빈국(賓
國)의 딸이고 부인은 원주 원(元)씨 군수 경심(景諶)의 딸과 해주 오(吳)씨이다. 자는 일소(逸少)다. 한양에
서 출생하고 거주했으나 부친이 왜란 중이던 1594년에 병으로 아산 사기소에서 졸하자 묘소를 아산 염치
동정리(독정이)에 모시고 3년 시묘를 하면서 인근 대실(죽실) 마을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 이후 후손
들이 인근 마을에 살면서 풍천임씨 세거지를 이루었다.
1591년(선조 24)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4년(선조 37)에 평강 현감(平康縣監), 1607년(선조 40)에 감
찰에 제수되었다. 1617년(광해군 9)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사예(司藝-정4품) 겸 춘추관 편수관을
지내던 중에 북인(北人) 주도로 인목대비 폐출이 추진되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온 뒤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70세에 졸했다. 조부인 내신( 臣)의 농장이 천안 방축동(쌍용 2동)에 있었는데 그는 임진왜란
중에 곡식 1,000여 석(섬)을 내어 군량미와 구호미로 쓰도록 했다. 특히 농장 인근 길가에 큰 솥 10여 개
를 걸어 놓고 죽을 쑤어 난민을 구호했다고 전한다. 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훈되었고 후에 이조참판 홍문
관제학에 추증되었다. 묘는 천안시 풍세면 구룡리 배골에 있으며 1686년(숙종 12)에 후손 홍망(弘望)이
찬한 묘지(墓誌)와 묘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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