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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문집으로는《전재집》
《고산집》
《속고산집》등이 있다.
[103] 임홍량
任弘亮
<1634(인조 12년) ~ 1707(숙종 33년)>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풍천(豊川)으로 아산 염치 죽실
에서 태어나고 거주했다. 명환(名宦) 내신( 臣)의 현손(玄孫)이
고 풍천 임씨 17세이자 아산 죽실 입향조(入鄕祖)인 사예공(司藝
公) 희지(羲之)의 손자이며 절충장군 준(晙)의 아들이다. 자는 여
인(汝寅), 호는 폐취( - 추를 취로 읽음)이다. 24세 때인
1657년(효종 8)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62년(현종 3)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여주목사(驪州牧使-정3품)를 지냈
다. 문장이 뛰어나서 1706년(숙종 32)에 현충사(顯忠祠)를 건립
할 때 상량문을 지었으며 문집 2권을 남겼다. 74세에 졸하였고
<임홍량의 묘>
묘는 아산시 염치읍 석두리 두모곡(두무실)에 있다. 후대의 학자
인 간재 전우(田愚)가 비문을 지은 묘갈이 있다.
[104] 임홍망
任弘望
<1635(인조 13년) ~ 1715(숙종 41년)>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아산 염치 죽실에서 출생했다. 명환(名宦) 내신( 臣)의 현
손(玄孫)이며 풍천 임씨 17세이자 아산 죽실 입향조(入鄕祖)인 사예공(司藝公) 희지(羲之)의 손자이고 증
참찬(參贊) 환( )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평산 신(申)씨로 감역 방헌(邦憲)의 딸이고 부인은 창녕 성(成)씨
로 사간 여관(汝寬)의 딸과 장수 황(黃)씨 판관 부( )의 딸이다. 자는 덕장(德章)이며 호는 태어난 마을 이
름을 딴 죽실(竹室)이다.
1657년(효종 8)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1666년(현종 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도원찰방과 가례도감 감조관, 지평·정언 등을 역임하고 현종(顯宗)의 산릉도감 낭청이 되었다. 1674년
(숙종 즉위년)에 정언으로 송시열(宋時烈)의 예론 사건에 대해 적극 옹호하다가 경성판관으로 좌천되었으
며 울산부사가 된 뒤로는 송시열의 유배지에 자주 왕래하기도 했다. 이어 제주목사·승지·우승지·황해
도·경상도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제주목사 재임 중에는 여러 서책(書冊)을 간행하고 부역과 세
금의 폐단을 시정해서 도민들을 편안히 해주었다. 1687년(숙종 13)에 공홍도(公洪道 충청도) 관찰사로 제
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병조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진위사(陳慰使)로 청나라의 연경에 다녀
온 뒤 우승지가 되었다가 남인(南人)이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기사환국(1689년)이 일어나자 벼
슬을 버리고 잠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해(1689년) 다시 경주부윤에 제수되어 부임하는 도중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문묘에서 쫓겨나
게 되자 사직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재임 중인 이듬해에 중전 민씨가 폐서인되자 벼슬을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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