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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예산학 특강 - 禮山이 낳은 금석학자 秋史 金正喜 재조명
Ⅳ.金陸珍‘撰幷書’의?藏寺碑
하여 비의 잔편 두 개를 발견하고 128자를 심정하였다.
63)
김정희가 심정한 잔편의 내용과 김정희의
제지(題識) 2편은 탁본으로 만들어졌고 유희해에게 전해져 『해동금석원』에 부록으로 실렸다. 조선
의 금석자료 수집에 열성이었던 옹수곤은 1815년에 이미 세상을 떠난 터였다. 옹방강과 옹수곤은
김정희는 순조 16년(1816) 7월, 금석문자 1천 권을 읽었다는 동호(同好)의 벗 김경연
57)
과 함께 북
생전에 이 무장사비의 하단을 보지 못한 것을 몹시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한산 진흥왕순수비를 수방(搜訪)하였고 이듬해(1817) 6월, 조인영과 함께 다시 심정하였다. 그 해
김정희는 탁본을 한 뒤 잔편에 발견 경위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겨울에는 경주 무장사비의 잔편을 발견하였다. 무장사비는 당시 조(朝)·청(淸) 금석학자들 사이에서
관심거리였다. 중국의 상감가(賞鑑家)들은 왕우군(王右軍)의 정수를 깊이 얻은 것이라고 여겼다. 또
이 비석은 옛날에 단지 한 조각뿐이었다. 내가 여기 와서 샅샅이 뒤져 또 동강난 돌 한 조각을 거친
그 이듬해에는 문무왕릉비 일부를 재발견함으로써 금석학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수풀 속에서 찾아내고 너무나 좋은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두 조각을 한데 합쳐 묶어서 절 뒤쪽 회랑
무장사비와 관련하여, 김정희의 외가쪽 어른인 금석학자 유척기(兪拓基: 1691~1761)는 “내가 『금
으로 옮겨 비바람을 면하게 하였다. 이 비석의 서품은 마땅히 백월비(白月碑) 위에 있어야 한다. 난정
석록』 수백 권을 모았으나 아직 이 비를 보지 못하였고, 두 번 영남관찰사로 부임하여 부지런히 찾
서에 나오는 ‘숭(崇)’자 세 점이 이 비석에서만 특별히 완전하다. 담계(옹방강) 선생이 이 비석을 가지고
아보았으나 경상도 지방에서는 (이 비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58)
고 하였다. 이계(耳溪) 홍양호
고증하였다. 동방의 문헌이 중국에서 칭찬을 받은 것으로는 이 비석 만한 것이 없다. 내가 세 차례를
(洪良浩: 1724~1802)에 의하면, 그가 경주부윤으로 재직할 당시 무장사비를 발견하여 탁본했다고
반복해서 문질러 닦으며, 성원(星原: 옹수곤)이 하단을 보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정축년
한다. 홍양호는 “뒤에 들으니 어떤 장서가가 일찍부터 무장사비 전본(全本)을 갖고 있었는데 앞뒤의
64)
(1817) 4월 29일에 김정희 적다.
면이 모두 갖추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내가 탑본해 가지고 있는 것은 반 동강 난 앞면 뿐이요,
뒷면은 콩을 가느라 망가져 버렸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59)
라 하였다.
또 다른 돌조각에 “무슨 수로 구원(九原)에서 성원(옹수곤)을 일으켜 이 금석연(金石緣)을 함께
홍양호는 무장사비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는 무장사비 글씨를 보고는 “왕우군의 풍도가 있
할까. 돌을 얻은 날에 정희가 또 쓰고 탁본하여 가다”
65)
라고 적었다.
다”
60)
고 평하였으며, 서자(書者)를 김육진으로 보았다.
61)
김육진은 「단속사 신행선사비(斷俗寺神行禪
師碑)」의 글씨를 쓴 영업(靈業) 스님과 함께 왕희지의 홍복사비를 배운 경우라고 주장하였다.
62)
‘홍
옹방강의 『복초재전집(復初齋全集)』을 보면, 조선의 고비(古碑)에 대해 고증하고 발을 붙인 것이
복사비’란 당나라 고종 함형(咸亨) 3년(672)에 홍복사의 사문(沙門) 회인(懷仁)이 칙명으로 왕희지
실려 있다.
66)
관심의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옹방강은 김정희가 무장사비 잔편을 발견하기 이전에 무
의 글씨를 집자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를 가리킨다. 홍양호의 견해는 무
장사비 구탁본을 입수하여 고증을 마쳤다. 입수한 경로를 알 수는 없지만, 김정희 입연 이전에 사행
장사비가 김육진의 글씨라고 알려지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使行)을 통해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무장사비가 신라 사람 김육진의 ‘찬병서(撰幷書)’가 아니
18세기 후반, 홍양호에 의해 일편이 발견되었던 무장사비는 그 뒤 김정희가 다시 잔편을 발견하였
라 왕희지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김육진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글만 찬한 것
다. 김정희는 연경에서 돌아온 뒤 청나라 학자들도 큰 관심을 보였던 무장사비 실물을 찾으려고 노
[奉敎撰]으로 보았다.
67)
그는 무장사비에 대하여, 왕희지의 「난정서」와 회인(懷仁)이 왕희지의 글씨
력하였다. 그러다가 부친 김노경이 1816년 11월에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된 것을 기화로 경주를 방문
63) 『해동금석원』, 영인본 하권, 1007∼1008쪽, 「第二石」 참조. 
64) 原碑旁刻 “此碑舊只一段而已, 余來此窮搜, 又得斷石一段於荒莽中, 不勝驚喜叫絶也. 仍使兩石璧合珠聯, 移置寺之後廊,
?免風雨. 此石書品, 當在白月碑上. 蘭亭之崇字三點, 唯此石特全, 翁覃溪先生, 以此碑爲證, 東方文獻之見稱於中國,
無如此碑. 余摩?三復, 重有感於星原之無以見下段也. 丁丑四月二十九日 金正喜題識.”(『해동금석원』 상권, 1009쪽) 
57) 藤塚?, 「阮堂集及び阮堂先生全集の檢討」, 『靑丘學叢』 21, 1934, 140쪽.  
65) 「?藏寺碑殘片」 附記 “此石當係左段, 何由起星原於九原, 共此金石之緣. 得石之日, 正喜又題, 手拓而去.”(『조선금석총
58) 『耳溪集』 권16, 41a, 「題?藏寺碑」 “老夫平生, 聚金石錄數百卷, 猶未得是碑, 再按嶺節, 求之非不勤矣, 闔境無知者.” 
람』 상권, 47∼48쪽) 
59) 『耳溪集』 권16, 42b, 「題?藏寺碑」 “後聞藏書家, 曾有?藏碑全本, 具前後面. 今與所?, 卽前面之半, 而後面則爲磨豆所
66) 『復初齋文集』 권24에 「跋平百濟碑」·「跋新羅?藏寺碑殘本」·「跋新羅雙谿寺碑」, 권25에 「跋高麗靈通寺大覺國師碑」·「跋
滅, 重可惜也.” 
高麗重修文殊院記」, 『復初齋集外文』 권3에 「跋朝鮮靈通寺大覺國師碑」가 실렸다. 이 가운데 「跋新羅?藏寺碑殘本」은
60) 『耳溪集』 권16, 42a, 「題金角干墓碑」 “余觀?藏碑, 有右軍之風.” 
유희해의 『해동금석원』에 전재되었다. 『해동금석원』(영인본) 하권, 1009∼1011쪽 참조. 
61) 『耳溪集』 권16, 41a, 「題?藏寺碑」 “考其文, 卽新羅翰林金陸珍書也.”  
67) 이러한 견해는 1919년에 편찬된 『조선금석총람』(상권, 48쪽)에 반영되어 오늘날까지 국사학계 등 학계 전반에서 다수설
62) 『耳溪集』 권16, 46b, 「題尹白下書軸」 “東方之書, 祖於新羅之金生. …… 其後在羅, 則有金陸珍釋靈業, 學弘福碑.” 
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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