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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임헌회
任憲晦
<1811(순조 11년) ~ 1876(고종 13년)>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아산 염치 출신이다. 풍천 임씨 아산 입향조(入
鄕祖)인 사예 희지(羲之)의 9세손, 지중추부사 홍망(弘望)의 7세손, 절의 징하(徵夏)의 5세손이다. 징하(徵
夏) 이후의 고조 시구(時九-종숙 창하의 계자가 됨)와 증조 증사복시정 신백(信白), 조부 증이조참의 농옹
(聾翁) 태춘(泰春)은 모두 신임사화(신임옥사) 이후에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그의 아버지 증이조참
판 취국(醉菊) 천모(天模) 또한 강직한 성품으로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재물을 구하지 않고 효행과 도의로
서 살았다. 어머니는 남양 홍씨로 익화(益和)의 딸이며 그는 2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명로(明
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이다. 우암 송시열의 6세손으로 당대의 학자인 강재(剛
齋) 송치규(宋穉圭)의 문인이 되었다. 또한 외암 이간(李柬)의 낙론과 맥을 잇고 역시 학자로 명성이 높았
던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 되어 수제자로서 매산의 학통을 계승하였고 아산으로 찾아와 제
자가 된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전수했다.
1836년(헌종 2) 진사시 복시에서 불합격된 뒤 출사(出仕)의 뜻을 접고 송치규를 찾아가 학문에만 몰두했
다. 그 뒤 김매순(金邁淳)·홍석주(洪奭周)·홍직필(洪直弼) 등을 찾아다니며 수학하다가 1842년에 홍직
필의 학문을 전수할 제자가 되어 전재(全齋)라는 호를 받았다. 좌의정 조두순(趙斗淳) 등의 천거로 1858
년(철종 9)에 효릉참봉, 이어서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전라도사·군자감정·경연관 등에 제수되었으
나 모두 사양하다가 계속된 천거로 결국 출사하게 되었다. 1864년(고종 1)에 부사직·장령·집의·장악
원정 등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부호군·호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왕명으로 만동묘(萬東廟) 제향
이 철폐되었는데 그는 사직(辭職)과 함께 왕명을 거두어달라는 상소를 거듭 올려 마침내 제향을 복구하게
했다.
이후 1873년에 그는 연기군 전의(全義)로 가서 은거하고 산림(山林)으로 지내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874년(고종 11)에 대사헌·좌유선·이조참판·좨주·찬선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기
호학파 주기론의 학통을 계승하고 낙론(洛論-인물성동론) 계열로서 심시기(心是氣)·성즉기(性卽氣)·
명덕즉기(明德卽氣)를 주장했다. 학문은 기질을 변
화시키는 것이며 곧 수양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다
고 했다. 이항로(李恒老) 문하인 김평묵(金平默)의
‘명덕은 이(理)’
라는 주장에 대해 서신을 통해 논
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66세에 졸하였고 1901년(고종 38-광무 5)에 의
정(議政) 윤용선(尹容善)의 주청으로 내부대신(內
部大臣)에 추증되었으며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산시 염치읍 동정리에 있는 독성서원(獨
醒書院)과 연기군 남면 덕성서원(德星書院-숭덕사
<崇德祠>)에 배향되었다. 묘는 공주시 계룡면 향지
<임헌회가 세운 독성서사를 이은 독성서원>
산 아래에 있으며 1907년에 제자 전우(田愚)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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