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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를 받았다.
그에게 시호가 내려진 이듬해인 1858년(철종 9)에 문중의 후
손이자 대학자인 전재(全齋) 헌회(憲晦)가 주도하고 경향의 유
림이 발의하여 염치읍 동정리에 독성서사(獨醒書社)를 건립하
고 그(창)의 종질인 서재 징하(徵夏)와 함께 배향했다. 그러나
불과 10년 뒤인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지난 2004년에 후손들이 독성서원(獨
醒書院)으로 복설하면서 다시 배향되었다. 묘는 아산시 염치읍
쌍죽리 신방골에 있으며 이조참판 민병승(閔丙承)이 짓고 후손
<임창이 배향된 독성서원 현판>
간재(艮宰)가 추기(追記)한 신도비를 세웠다.
[101] 임형
任泂
<1660(현종 1년) ~ 1721(경종 1년)>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아산 염치 동정리에서 살았다. 명신(名臣) 내신( 臣)의 후
손으로 풍천 임씨 아산 입향조(入鄕祖)인 사예 희지(羲之)의 증손자이자 환( )의 손자다. 지중추부사 홍
망(弘望)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창녕 성(成)씨로 사간 여관(汝寬)의 딸이다. 자는 중경(仲
-형을 경으로
읽음)이고 호는 독성(獨醒)이다. 효성이 지극해서 모친상에 성인의 예에 따랐고 계모를 지성으로 모셨으
며 문장이 뛰어나 칭송이 자자했다.
1690년(숙종 16) 식년시 진사과에 급제한 뒤 음직으로 와서별제(瓦署別提)를 지냈다. 1699년(숙종 25)
에 다시 증광 문과에 합격했지만 이 때 일부 응시자들이 답안지를 바꾼 부정이 발각되어 모든 급제자의
합격이 무효 처리되었다가 1710년에야 복권되어 사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전적·좌랑·장령·정언·
사간 등을 역임했고 외직으로도 김포군수·남양부사 등을 지냈으며 1720년(숙종 46)에 사헌부 집의(執
義-정3품)에 제수되었다. 62세에 졸했으며 묘는 아산시 염치읍 동정리 독정촌(독정이) 부친의 묘 아래에
있다. 매산 홍직필(洪直弼)이 지은 묘지(墓誌)와 아들 징하(徵夏)가 짓고 6세손 두호(斗鎬)가 추기한 묘표
가 있다. 묘표지만 신도비처럼 크게 만들어 세웠다.
<임형의 묘표>
<임형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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