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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山의
조익(趙翼)(1556~16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豊壤),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
저(浦渚), 존재(存齋)이며, 장현
광윤근수의문인이다.
서울 창신동에서 출생하였으며
포저가 예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사후 묘소가 신양면 신양리 백석
포저 조익의 묘 (신양면 신양리)
신도비
에 안장되면서 부터다. 생전에는
예산과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근거를 찾을 수 없다. 1986년부터 포저공 추모사업이 시작되
면서예산의인물로다시조명되게되었다.임진왜란중음보로정포만호가되어1598년(선
조31년)군량미23만석을운반하는공을세웠다.임진왜란이끝난뒤다시수학하여1602
년별시문과에병과로급제,승문원정자에임명되어본격적인벼슬살이를하였다.그러나삼
사의관직을두루지내던중1611년(광해군3년)김굉필,조광조,이언적,정여창등을문묘
에배향할것을주장하다가고산도찰방으로좌천되고,이어웅천현감을역임하였다.뒤이어
인목대비가유폐되는사태가빚어지자벼슬을그만두고고향인광주(廣州)로은거하였다가
충청도신창으로옮겨살았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이조좌랑에 임명되어 신창을 떠나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이듬해
의정부검상사인(舍人)에임명되고,이어웅교,직제학등을거쳐동부승지에올랐다.1631
년어머니가죽자잠시벼슬을떠났으나,삼년상을마친뒤곧관직에복귀하였다.
한성부우윤,개성부유수,대사간,이조참판,대사성,예조판서,대사헌,공조판서,한성부판
윤등을두루역임하면서이원익을도와대동법을확대관리하는일에도적극참여하였다.
1636년예조판서로있을때병자호란을당하자종묘를강화도로옮기고뒤이어인조를호
종하려다가,아들진양(進陽)으로하여금강화로모시게하였던80세의아버지가도중에실
종되어며칠동안아버지를찾느라직무를이탈하여인조를호종하지못하였다.그리하여호
란이끝난뒤그죄가거론되어관직을삭탈당하고유배되었지만그까닭이효성을다하고자
한데있었고아버지를강화도로도피시킨뒤에는윤계(尹啓),심지원(沈之源)등과함께경
기지역의패잔병등을모아남한산성을포위하고있는적을공격하여입성하고자노력한사
실이 참작되어 그해 12월에 석방되었다. 그 후 3년 뒤에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으로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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