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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어린시절서천에서부여군으로오다.

남,
정종진은 1942년 생으로 서천군 화양면 출신이다. 초등학교를 2년을 다니고 6.25 전쟁

이 발발해 학교를 못 다녔다. 전쟁 이후 1952년도에 생활고로 인해 가족들과 이불, 그릇



등살림살이를지게에이고자갈길60리를걸어서부여에왔다.의령남씨인외가가부여에


터를잡고있었던것이다.가정형편이어려워어릴적부터남의집에서일을도와주고밥을


얻어먹고, 남의 집 웃방에서 곁방살이를 하였다. 하루 종일 밭을 매면 당시 100원을 벌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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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그당시100원은쌀한됫박정도를살수있는돈이었다.
초례의추억
농사일로먹고살다가1963년에입대하여부산해운대에서군대생활을하고1965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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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했다.이후1968년에외가친척이중매를해서풍양조씨이자한살많은지금의아내
를만났다.혼례식은전통식으로신부집에서먼저했는데신부집에스스로함진아비를해
함을지고갔다.혼례식을마친후첫날밤을그곳에서보내고집에왔다.그당시에는초례
를마친후동네젊은이들이신랑을거꾸로달아놓고발바닥을때리는의식을치렀는데정
종진도목침으로발톱이빠질정도로맞았다.결혼이후700평의논을사서농사를지었다.
광산생활
결혼이후에는농사와함께광산에서일을했다.두가지일을겸할수있던것은광산이
집에서 가까워 낮에 근무하고 밤에는 농사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종진이 다녔던
광산은지토리에있었던금광이다.지토리에금맥이있어일제강점기때부터금광이열렸
다.당시에는대명광산에소속된임천광업소가운영되었는데,흔히임천광산으로불렀다.
정종진은임천광업소소속감독으로약10년동안일을했다.
금광의일은험하기도하고위험하기도했다.항내라고불리는금캐는구덩이에서발파
를 하는게 첫 번째 작업단계였다. 구덩이 안은 공기가 좋지 않아 콤프레셔를 사용하여 지
하로바람을넣어줘야한다.캐낸원석을일종의방앗간같은시설을이용해빻고,물이내
려가는것을이용해동판이라는데에금이얹히게한다.그이후수은을발라놓으면수은
에금이붙는데,이것을‘수은이금을문다’라고표현하였다.수은은긁어내면금만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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