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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3년(숙종 39)에 진사시 1등 3위, 생원시 1등 5위로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에 증광
문과에 급제했다. 1717년(숙종 43)에 가주서로 출사하여 1721년(경종 1) 지평에 올랐으나 신임옥사로 삭
직되었다가 1725년(영조 1)에 노론이 집권하면서 사서·정언을 거쳐 장령에 올랐다. 그는 사서(司書)로
있을 때 종숙(從叔) 창(廠)의 신원(伸寃)을 간하는 상소를 올렸고 정언 재직 중에는 아버지 형(泂)이 창(廠)
의 일로 무고를 당하였음을 간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이듬해(1726년)에 장령일 때 6개조의 만언소(萬
言疏)를 올려 탕평책을 반대하고 신임옥사를 일으킨 소론의 제거를 주장하다가 평안도 순안(順安)으로 유
배당했고 이듬해에 소론이 집권하자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729년(영조 5)에 사헌부의 요청
으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역모의 죄로 친국을 받았으며, 이때 전후 28차례의 형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주장
을 굽히지 않고 죄를 인정하지 않다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 아들의 상언으로 신원복직(伸
復職)되었다. 1809년(순조 9)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1883년(고종 20)에 좌의정 김병국(金炳國)의 요청으로 이
조판서에 증직되었고 1910년(순종 3)에 충헌(忠憲)의 시호
가 추증되었다. 남제주 안덕면에 그의 5세손 헌대(憲大)가
1862년(철종 13)에 제주목사로 갔을 때 세운 적려유허비
(謫廬遺墟碑)가 있다. 묘는 아산시 염치읍 동정리에 있다.
간재 전우(田愚)가 비문을 짓고 5세손 두호(斗鎬)가 추기한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동정리에 있는 독성서원(獨醒書院)에
<임징하의 묘 상석>
배향되었다.
[100] 임창
任廠
<1652(효종 3) ~ 1723(경종 3)>
조선 후기의 지사(志士)로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아산 쌍죽리에서 출생했다. 명신(名臣) 내신( 臣)의
후손으로 풍천 임씨 아산 입향조(入鄕祖)인 사예 희지(羲之)의 증손자, 환( )의 손자, 홍정(弘挺)의 장남
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다. 자는 회이(晦而)고 호는 강개옹(慷慨翁)이다. 그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던
학자로서 1689년(숙종 15)에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고 2년 뒤(1701년)에 세상을 뜨자 이에
비분강개하여 걸어서 한양에 올라가 대궐 앞에서 통곡하며 상소문을 올렸다. 인현왕후의 죽음이 장희빈
과 남인(南人) 일파의 저주와 흉계에 의한 것이니 이러한 변고를 태묘(太廟-종묘)에 고하고 그들을 엄벌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때 그는 임금(숙종)으로부터 강개사(慷慨士)라 포장을 받고 강개옹의 호를 갖게 되
었지만 이 일로 인해 화를 입어 이듬해(1702년)에 나주로 유배되었다가 아들 두하(斗夏)의 요청으로 풀려
났다. 그 뒤 1722년(경종 2)에 다시 남해 절도에 정배되었다가 1723년(경종 3)에 남인들에 의한 임인무옥
(壬寅誣獄)으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아 모진 고문을 당한 뒤 72세의 나이에 참형 당
했다. 1725년(영조 1)에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의 요청으로 사면되고 지평에 추증되었으나 1727년(영조
3)에 정미환국으로 증직이 환수되고 죄안(罪案)에 다시 올랐다가 1801년(순조 1)에 증직이 회복되었다. 그
후 1857년(철종 8)에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요청으로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정(忠定)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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