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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山의
성흔(成炘)(1555~1626)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삼괴당(三愧
堂),자는군열(君悅),본관은창녕이다.양
주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팔원(八元)
어머니는전주이씨다.
그의 증조는 중종반정공신으로 일족이 모
두 반정에 가담한 의(義)를 숭상하는 집안
이었다. 삼괴당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
성흔의 묘 (신양면 귀곡리)
읽기와 글씨 쓰기를 좋아하여 명필가의 소양이 보였다. 선조 21년(1588) 중사마양시(中司
馬兩試)에 급제하여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시마사국기사관(洗馬史國記事官)을 거쳐 임
진왜란후승정원가주서장예원사의(承政院假注書掌隸院司議)에이르렀다.그당시의조정
은당쟁이치열하던시기라약화된왕권과대북파의전횡으로몹시혼란스러운시기였다.
광해군5년(1613)에일어난계축옥사에천기(天記)누설의죄를범하자어지러운정치,흔
들리는법도에실망한나머지벼슬을사직한다.당시의민심은상하가불복하고흉흉하여언
제닥칠지모를멸문지화의위험을피하기위하여세거지인양주에서식솔들을거느리고중
조성회옹의처가(담양전씨)가있던대흥현원동면귀곡(현재예산군신양면귀곡리)산중
으로낙향한다.이곳에불천지위의사당을모시고살다이웃동네인가재울로이사하여옥녀
봉줄기에선고찰방공유택을안장하고산아래에사당과거사(居舍)를이전하고주위에느
티나무한그루,마을입구에한그루,귀곡초등학교자리에한그루등3개의나무를심고느티
나무괴(槐)자를써삼괴정사(三槐精舍)라명명하고자신의호를삼괴당이라호칭하였다.
삼괴당은이곳을강학의서재로삼아많은사람들을가르쳤고특히그의필법은당시의서
예가한석봉과비견되었으나불행이도유묵은전하나유고는전하지않는다.
삼괴당이처음불천지위신주를모시고낙향한곳은귀골(貴谷)이란지명으로불렸으며출
타하다동구밖으로쉬어가던곳은덕의정(德義亭)이란이름으로불리다후에충남제일의
해복지지(명당)가되었다.가재울은성인군자가가히살만한곳이라하여그리불렀다.그리
하여예산의창녕성씨입향의확고한세업(世業)이열린것이다.
삼괴당은인조반정으로다시벼슬길에나아갈수있었으나오로지가업과학문과서예에몰
두하면서정착하였다.
풍수지리에도상당한조예가깊었고토정이지함과교류가있었다하나확인한길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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